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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이야기 해줄까 #10. 기이 - 벽에 새겨진 문양 (2)

중앙일보

입력

양쪽 가슴에 돋아난 작고 가느다란 식물 두 개.
내가 무어라 말을 건네기도 전에 기이가 손가락으로 잡더니 아래쪽으로 꺾어버린다. 젖꼭지에서 떼어지며 톡, 하는 소리가 났다.
왜.
묻고 싶었다.

“가지치기는 필요해. 더 중요하고 크고 아름다운 열매를 얻으려면.”

생각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한 대답이었다. 식물이 떨어진 곳에서 하얀 액체가 배어 나왔다. 기이가 아랑곳하지 않고 손바닥으로 쓰윽 닦아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여전한 몸을 흔들며 거실 창으로 걸어간다.

누워 있는 저것.
볼록한 엉덩이에 환한 빛무리를 달고 있는 저것은 내 등뼈 사이에서 나왔다.
여자, 그러니까 이름이 기이라는 그것의 말이다.
자기가 온 것은 순전히 내 부름으로 가능한 일이라 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누군가 호출하고 무언가 호출되는 일 따위. 나는 소설이 쓰고 싶었고, 써야 했으며 모니터의 커서가 더 이상 멈추지 않길 오로지 바랐다. 벽에 뜨거운 이마를 대고 기도하거나 손으로 어루더듬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게 다였고 모든 것이었다.
기이는 며칠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거실 창 앞에 볼록하게 반짝거리는 빛으로 엎드려 있거나, 아니면 벽의 어두운 모서리로 스며들었다. 나는 기이 말이 사실일지 모른다고 믿게 되었다. 사람은 아니지만 사람 형체였고, 계속 진행 중이었으며 살을 비벼대는 존재로 곁에 있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저것이 내 몸에서 생성된 것이라 생각하면 섹스 같은 건 절대 하고 싶지 않다. 나체로 눈앞을 오가는데 단 한 순간도 반응이 일지 않았다.

벽에 있을 때라면 기이는 소리도 움직임도 없다.
무생물의 고요한 흔적처럼 서 있어 얼핏 지나쳐 보면 원래부터 벽지에 새겨진 문양 같기도 하다. 눈을 꼭 감고 어둠 속에 있지만 우둘투둘한 질감으로 자신의 실재를 알려주었다. 다가가 벽에 새겨진 기이를 더듬으면 손가락이 일렁이며 둥근 곡선을 그렸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분명한 감각, 분명한 온기와 분명한 감촉의 코드로 기이의 문양은 매번 읽혔다.
나는 종종, 어느 날은 자주 기이가 서 있는 벽을 더듬었다.
몽롱하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기이 앞에 있었다. 끌림의 이유도 모른 채 벽으로, 벽으로 가고 싶었다. 날이 갈수록 빈번해졌다. 벽은 서늘했고 그것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작고 낮았다.
문장은 솟아나지 않고 그렇게 절망의 순간이 찾아오면 매달렸다. 뜨거운 이마가 서늘해질 때까지 차가운 벽에 의지한 채 눈을 감기도 했다. 가만히 있으면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사소한 것으로 사그라졌다. 한낮에야 잠들었고 달빛이 스며든 밤, 눈을 뜨자마자 벽으로 걸어간다. 매일이 그런 반복으로 이어졌다.
벽의 기이가 꿈틀, 움직였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다. 거실 창 앞에 누워있더니 이제는 줄곧 벽에만 서 있다. 만지면 우둘투둘하게 도드라진 느낌뿐이던 몸이 말캉거린다. 알 수 없다. 등뼈를 찢고 나온 생물이 진행의 몸이 되고 함께 살아가는 나도, 말캉했던 것이 다시 벽처럼 딱딱해지고 또다시 말캉거리며 온기를 품는 일은. 나는 저편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는지, 언제 내게 달려들지 모르는 기묘한 지점에 있었다.

몸이 서늘해 눈을 떠보니 사방이 어두웠다.
하루를 꼬박, 벽에 이마를 댄 채 잠든 모양이다. 기이가 온 뒤로 잠이 쏟아졌다. 하얗게 색이 바랬던 불면의 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어디서든 머리만 기대면 잠들었고 모르는 순간에 잠들었다. 문제였다.
머리카락 속으로 쓰윽 손가락들이 들어온다.
부드러운 손길에 고개를 들다 입안에 무언가 들어있는 걸 깨달았다. 체온을 품은 동그랗고 말캉한 알맹이, 침과 함께 그것을 퉤퉤 뱉었다. 비릿한 기운이 혓바닥에 남아 계속 입맛을 다셨다.
기이가 나를 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내가 입에 물었던 건 기이의 젖꼭지였다.
자는 동안 물고 빨았던 젖꼭지 한쪽이 거봉만 하게 부풀어있었다. 다른 한쪽은 절반 크기다. 여자의 젖꼭지라는 게 저렇게 클 수 있을까 싶었다. 여자친구였던 윤은 아무리 핥고 빨아도 입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저 끝에 머물렀는데.
기이의 눈에 자애로운 웃음이 어리더니 점점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사람이 너무 기가 막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웃는 눈을 피해 눈앞의 매끄러운 배와 허리의 곡선 따위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뛰었다. 남녀 사이 미묘한 기운이 아니라, 단지 치욕스러웠다. 말할 수 없이 불경스러운 일을 저지른 심정이었다. 괜찮아. 기이의 눈이, 입이 말했으나, 괜찮지 않았다.

윙윙거리는 소리. 벽에서 몸을 일으키자 눈앞이 흔들리며 어지럼증이 일었다. 책상으로 가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하얀 프레임 속에서 작고 까만 벌레처럼 뛰는 커서. 소설은 여전히 제자리였다.
나는 문장을 쓰며 매 순간 부메랑의 곡선을 꿈꾸지만 아무것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모니터 속으로 던지는 하나의 문장이 열 개의 줄기가 되는 일은 없었다. 좋은 문장이나 영감은 언제 어떤 통로로 파고들지 모르는 빛과도 같다. 쏟아져 내려도 인식하지 못하면 그것은 거리의 흔한 빛무리에 불과하다. 안으로 파고들어 나를 움직이고 몸을 덥히는 게 아니라면 타인의 빛일 뿐이다. 닿을 수 없는 먼 세계였다.

진동이 울렸지만 휴대폰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를 뒤적여도 찾을 수 없다. 끊임없이 울려대는 진동을 향해 욕이라도 뱉고 싶었다. 몸을 숙이자 책상 밑에서 푸른빛이 깜빡거렸다. 나를 찾는 건 함께 술을 마시던 소설가들이거나 어머니뿐이다. 어디에도 소설을 발표하지 못한 후로는 아무도 찾지 않았고 나 또한 가지 않았다.
액정의 진동은 역시 어머니였다. 휴대폰을 꼭 쥐고 걸어 소파에 모로 누웠다. 진동이 끊어졌다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손을 가슴으로 그러모으고 눈을 감았다. 심장 부근에서 푸른빛이 깜빡거린다는 걸 알고 있다. 그 작은 진동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몸을 휘감았다. 진동이 울리고 그것을 몸으로 느끼는 동안의 나는 아직 여기에 살아있다. 심장에서 푸른 진동이 계속되었으므로, 어쩐지 편안해졌다.
눈을 감은 채 커서가 멈춘 부분을 머릿속으로 끄집어냈다.

‘글자들이, 문장이 솟아오르지 않아. 소설가이고 싶어 소설을 쓰던 나는 이미 사라졌지. 모니터 앞에 멍하니 앉아 있어. 살점을 뜯어먹고 싶을 만큼 손끝이 뜨겁고. 내 안의 그림자가 어떤 문양들로 새겨졌는지 꺼내보고 싶지만 이야기는 솟아나지 않아. 아무것도 쌓이지 않는데 나는 점점 거대해져. 속은 텅 비었지만 아주 거대해진 채 언젠가는 날아가 버리겠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후욱, 귓가로 바람이 불어왔다.
화난 목소리에 눈을 떴다. 모니터 앞의 벌거벗은 기이가 보였다. 가스레인지 위의 냄비에서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났다. 식탁에 음식접시들이 가득했고 그 낯선 풍경이 담긴 실내가 정말 환했다. 몸을 일으키자 휴대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분명 소파에서 눈을 감고 가슴으로 진동을 느끼며 커서가 멈춘 소설을 떠올렸고 거실엔 아무도 없었고 저 벌거벗은 생물은 벽의 모서리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목이 메었다. 예상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물음에 목이 메는 일 따위.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기이가 자판을 탁탁 두드렸다. 벽에 새겨져 있어야 한다 말하고 싶었지만 생각뿐이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기이는 충분히 무례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소설을 헤집고 해석하고 함부로 비판했다. 불쾌했지만 방어나 전투력을 잃은 지 오래였다. 소파에 내려앉으며 뜨거운 이마를 짚었다. 기이가 드르륵드르륵 소리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내가 써놓은 문장은 금세 끝났다. 이내 눈 내리는 창밖 풍경처럼 하얀 화면만 이어졌다.

“마우스를…”

머리를 감싸 쥐고 소파에 묻히듯 웅크렸다. 눈앞에서 작고 까만 벌레가 깜빡깜빡 뛰었다. 기이는 드르륵드르륵 소리로 계속 하얀 화면을 헤집었다.

“마우스를!”

거실이 조용해졌다.
탁, 기이가 마우스를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기이와 나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머리를 감쌌던 손을 내렸고 기이는 획 돌아서 벽 쪽으로 걸었다. 맨발이 찐득하게 바닥에 달라붙었다. 벽의 모서리에 선 기이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휴대폰을 다시 쥐고 소파에 누웠다.
벽의 저 생물을 어딘가로 보내야겠다. 내가 잠결에 물고 빨아 거봉만 하게 부푼 저 무례한 젖꼭지의 문양을.
보내야겠다. 그게 어디든 상관없다.
하지만 하룻밤 만에 벽에서 완전하게 떨어져 나왔다. 잠에서 깨어보니 그랬다. 내 공간의 벽에 새겨진 문양은 사라졌다. 분명 처음이지만 이미 짐작했던 일인 것도 같다. 기이는 완전하게 벽에서 떨어져 나왔고 나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매일의 기이는 다시 거실 창 앞에 엎드려있기 시작했다.
햇살에 늘어진 애완동물처럼 유순한 눈으로 내 움직임을 쫓거나 뿌옇게 떠다니는 먼지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볼록한 엉덩이의 빛은 날이 갈수록 희미해졌다. 희미하네, 희미해졌군, 희미해 생각하면서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나는 뜨거운 시간을 지나는 중이었었다. 그게 모든 것이었다.

“아, 상쾌해.”

기이가 바닥에서 일어나 길게 기지개를 켰다. 동시에 형광등이 나가듯 팟, 소리가 났고 엉덩이 빛이 꺼졌다. 완전하다. 어쩐지 나는 빛의 꺼짐을 그렇게 여겼다.
진행이 끝났다고 했다.


작가 소개    
동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단편 『아칸소스테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등단.
창작소설집 『마리 오 정원』
테마소설집 『2012신예작가』
12월 테마소설집 출간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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