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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만에 가족과 설쇠는 청주 축사노예 만득이의 특별한 설날

중앙일보

입력

`축사노예’ 피해자인 고모(48)씨가 지난해 11월 20일 청주시장애인가족지원센터 직원들과 전남 여수시에 있는 박물관을 방문해 대형 벽화 앞에서 ‘V’를 그리며 웃고 있다. [사진 청주시장애인가족지원센터]

`축사노예’ 피해자인 고모(48)씨가 지난해 11월 20일 청주시장애인가족지원센터 직원들과 전남 여수시에 있는 박물관을 방문해 대형 벽화 앞에서 ‘V’를 그리며 웃고 있다. [사진 청주시장애인가족지원센터]

설 연휴를 나흘 앞둔 지난 23일 오후 7시 충북 청주시 오송읍의 한 마을. 지난해 7월 국민적 공분을 산 ‘축사노예’ 사건의 피해자 고모(48·지적장애 2급)씨가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김치, 김 등을 반찬으로 밥 한 그릇을 금세 비웠다. 이를 지켜본 어머니(78)는 “아들이 가족과 함께 사는 게 꿈만 같다”고 말했다. 39.6㎡(12평) 남짓한 방 안엔 온기가 가득했다.

고씨는 지난 2일부터 청주의 한 장애인직업재활시설에서 전자부품 등을 조립하는 일을 하고 있다. 기자가 “직장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 뭐냐”고 묻자 그는 대답 대신 종이와 볼펜을 꺼냈다. 5분 뒤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 그림이 메모지에 그려졌다. “직장동료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던 고씨는 요즘 사람 만나는 재미에 푹 빠졌다.

지난 23일 오후 충북 청주시 오송읍 자택에서 만난 고씨가 “직장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을 소개해 달라”는 질문을 받자 대답 대신 사람 그림을 그린 뒤 “직장동료”라고 소개했다. 최종권 기자

지난 23일 오후 충북 청주시 오송읍 자택에서 만난 고씨가 “직장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을 소개해 달라”는 질문을 받자 대답 대신 사람 그림을 그린 뒤 “직장동료”라고 소개했다. 최종권 기자

고씨가 20년 만에 가족과 설을 맞는다. 19년간 ‘만득이’로 불리며 고된 축사 노동에 시달린 고씨는 지난해 7월 가족과 극적으로 재회했다. 고씨는 지난달부터 청주시장애인가족지원센터에서 한 달간 교육받고 장애인직업재활시설에 채용됐다. 장애인이란 이유로 학교에 다니지 못한 고씨는 곧 초등학교 과정을 밝는다. 최근 청주 모 초등학교 입학 허가를 받았다.

오는 3월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특수학급 교사가 작업장을 찾아와 한글과 숫자를 가르치는 방식이다. 강금조 장애인가족지원센터 사무국장은 “한글을 깨우치기만 해도 고씨의 삶이 더 윤택해질 것으로 보고 교육을 권유했다”며 “지난해 12월 입학 서류를 내기 위해 학교를 찾은 고씨가 교실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의자에도 앉아 보는 등 배우려는 의욕을 보여 다행이다”고 말했다.
고씨는 직장에 다니면서 표정이 한층 밝아지고 말도 많아졌다고 한다. 그는 축사를 탈출한 직후 그는 3개월 동안 일상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낮엔 잠을 자고 저녁에만 동네를 배회했다. 세면대에 물을 받아먹기도 하고 일을 시키면 쉬지않고 하는 등 이상 행동도 보였다. 고씨의 고종사촌 형인 김모(64)씨는 “고립된 축사를 나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의사소통 능력이 향상됐다”고 말했다.

고씨는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모습도 사라졌다. 지난해 11월 장애인가족지원센터 직원들과 전남 여수·순천으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온 뒤 달라진 모습이라고 가족들은 전했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빼 먹기도 하고 음료수와 담배를 사는 것도 가능해졌다. 강 사무국장은 “고씨가 오랜 기간 수감생활을 하다시피 해 적응기간이 오래 걸릴 것으로 봤지만 워낙 사교성이 좋아 직장동료들과 친해졌다”고 말했다.

고씨는 1997년 충남 천안의 한 양돈농장에서 일하다 행방불명 된 뒤 소 중개인의 손에 이끌려 김모(69)씨 부부의 축사로 왔다. 이 곳에서 19년간 소 먹이를 주거나 밭일을 하는 등 무임금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법원은 지난주 노동력착취유인 등 혐의로 기소된 농장주 부인 오모(63)씨에게 징역 3년을, 남편 김씨에게는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최종권 기자 choig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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