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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잡이배 12시간 승선기] "선장님, 제발 뭍으로 데려다주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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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지난 16일, 홍어 선적 한성호 갑판에 올라온 흑산도 홍어.

지난 16일, 홍어 선적 한성호 갑판에 올라온 흑산도 홍어.

지난 16일 홍어잡이배를 탔습니다. 20t짜리 배였습니다. 길이가 10m가 훨씬 넘으니 연안에서 작업하는 배로서는 꽤 큰 편이죠. 안전할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전남 신안 흑산도 예리항 방파제를 벗어나자마자 배가 하늘로 솟구치더군요. 비로소 알았습니다. 크든 작든 바다에서 배는 일엽편주일 뿐이라는 걸. 또 그날은 풍랑주의보가 해제된 지 18시간 정도 지났을 때입니다. 성난 바다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뛰어든 셈이지요. 흑산도 홍어 어장은 홍도 앞바다에 있습니다. 예리항에서 약 25km 정도 떨어진 곳이지요.

2m 거친 파도에 배 멀미로 초주검
'홍어 대풍'에 조업 시간은 길어지고…
산양처럼 가뿐하게 움직이는 선원들에 감탄

오호~꽤나 낭만적인걸~
파고 2~2.5m의 성난 바다, 국내에서 여섯 척 밖에 없는 홍어잡이배, 고깃배 이물에서 부서지는 새하얀 포말. 예리항을 벗어나 2시간 정도까지는 '이거 꽤 낭만적인걸' 했습니다. 배의 이물과 파도가 부딪어 갑판을 덮칠 때도 '야호' 소리를 질렀지요. 1시간 30분 정도 갔을까. 홍도 2구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탄 한성호는 홍도 2구가 기항입니다. 여기서 '걸낚'이라는 어구를 싣고 다시 홍어들이 노니는 어장으로 기수를 돌립니다. 참고로 흑산도에서 쾌속선을 타면 홍도까지 30분이면 갑니다. 고깃배가 쾌속선보다 3배 느린 셈이지요.

드디어 조업 시작
'뿌웅' 선장실 뱃고동이 아주 짧게 울렸습니다. '어장이 가까워졌으니 조업을 준비하라'는 지시입니다. 한성호는 이상수(52) 선장 외 5명의 선원이 있습니다. 다른 배도 5명 정도라네요. 조업에서 맡은 역할과 노동생산성, 수익성 등을 따진 인원이겠지요. 그 중 3명이 베트남 선원입니다. 엔진 소음과 언어 장벽 때문에 제대로 대화를 나누진 못했지만 세 청년의 이름은 렁(39)·흐엉(30)·웨이(37)였습니다. 그중 막내 흐엉이 선원들의 식사를 책임집니다. 나중에 들었지만, 월급은 150만원 정도를 받는다고 하네요. 연안어선에서 일하는 외국인 선원들은 거의 숙식을 제공받기는 하지만 고된 노동에 비하면 그리 많은 월급은 아니지요.

한성호의 베트남 선원들. 왼쪽부터 웨이, 렁, 흐엉.

한성호 이상수(사진 오른쪽) 선장과 선원들.
조업 중인 한성호 선원

홍어를 낚는 방법
홍어잡이 걸낚은 참 요상한 바늘입니다. 일단 미늘이 없습니다. 'ㄷ'자 모양으로 보통 낚시바늘 끝에 거꾸로 돋아난 돌기가 없다는 뜻입니다. 미끼도 끼우지 않습니다. 미끼 없는 낚시라는 점에서 루어와 비슷하지만, 원리는 전혀 다릅니다. 루어는 생미끼를 안 끼우는 대신 인공의 장치를 달아 고기를 현혹하지요. 홍어낚시는 이마저도 없습니다. 이유는 홍어를 낚는 방법에 있습니다. 바다 밑바닥에 걸낚을 쫙 깔아놓고, 홍어가 돌아다니다가 미늘 없는 낚시에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낚시 방법 중에 주로 숭어를 낚는 '훑치기'와 비슷하죠. 훑치기 역시 미끼 없이 큰 바늘만 있는 낚시를 멀리 던져 유영하는 숭어를 낚아채니까요. 원시적이라고요? 이 걸낚은 1990년대 후반 대청도 출신 흑산도 어민이 개발했다고 합니다. 이후 거의 모든 홍어잡이가 이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미끼를 끼우는 방식, 즉 주낙을 써왔습니다. 홍어잡이에 있어서만큼은 공갈낚시가 미끼낚시보다 낫다는 게 역사적으로 입증된 셈이지요.

그래도 드는 의문 하나
그 넓은 바다에 낚시 바늘 수 천 개, 수 만 개를 깔아놓는다 한들 홍어가 잡힐까요?
"사람들이 아무 데나 막 다니는 게 아니잖아요. 사람 다니는 길이 있듯 홍어가 잘 다니는 길이 있어요. 알 낳을 때는 얕은 수심을 좋아하죠. 여러 가지 복잡한 조합이 있지만, 요즘 같은 때는 알 낳는 데다 주로 걸낚을 놓지요. 평소에는 깊은 수로를 주로 이용해요. 홍어의 이동이 많은 날에는 주로 그 쪽에 걸낚을 놓습니다. 흑산도·홍도에 홍어배가 6척인데 각자 놓는 자리가 따로 있어요. 나는 할아버지 때부터 홍어잡이 배를 해서 홍도 앞바다가 주 어장이에요. 물려받은 셈이지요.”(이상수 선장)

걸낚에 걸려 올라온 홍어. 바닷속게 오래 잠겨 있었던 듯 색이 탁하다.

홍어의 알이 들어있는 낭. 어미의 몸에서 나온 알은 바닷속에서 자라 홍어가 태어난다.
홍어의 알.

걸낚을 한 바퀴 걷었습니다. 한 바퀴는 90m짜리 걸낚 스무개를 이어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총 길이 1.8km입니다. 낚싯줄 1m에 낚시바늘이 7~8개 달렸으니 약 1만개의 바늘이 홍어를 겨냥하는 셈이죠. 한 바퀴 걷었는데, 홍어가 10마리 잡혔습니다. 효율이 딱 0.1%네요. 낮다고요? 평소 한 바퀴 걷으면 한두 마리 나올까 말까 한답니다. 이날 효율이 아주 높은 편이지요. 그래서 '올해 홍어가 풍년'입니다.

배 멀미로 조업 30분 만에 초주검
사실 저는 홍어잡이가 시작되자마자 30분 만에 배 멀미로 고꾸라졌습니다. 잠이 쏟아질 듯 눈이 풀리고, 머리는 띵 하고, 속이 미식거리는 증상. 배 멀리 경험 한번이라도 있다면 다 알 겁니다. 이 증상의 마지막은 위속에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내는 것이지요. 오랜만에 구토였습니다. 이때 기나긴 고역을 예감했습니다. 첫 구토 이후 9시간 만에 뭍으로 나왔으니까 지독한 배 멀미를 했습니다. 덧붙이자면 저는 전남 해남 바닷가 출신입니다. 나름 야전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으나 진짜 뱃사람에 비하면 조족지혈임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홍어잡이배에 구들장이?
이때부터 갑판과 선실을 왔다 갔다 무한 반복했습니다. 외국인 선원들이 잠깐 휴식을 취하는 선실은 갑판 아래 있습니다. 형광등이 어디 있는 지 찾을 정신이 없어 그대로 뻗어 누웠습니다. 차디찬 바닥에서 서서히 온기가 올라오더군요. 처음엔 누가 날 위해 보일러를 켠 줄 알고 감동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선실 바닥에도 보일러를 깔았나'라는 의문이 들어 생각해보니 선실 아래는 엔진실이었습니다. 엔진의 열이 구들장 역할은 한 셈이죠. 배가 움직이지 않을 때, 그러니까 엔진의 RPM이 내려갈 때 구들장이 식는 걸 보니 확실히 맞는 듯 했습니다. 뜻뜻한 구들장에 쥐 죽은 듯이 누워 있으니 희한하게도 두통이 잦아들었습니다. 이번에는 배를 설계한 사람에게 고마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렇게 맛있다'는 선상 점심도 거르고
"밥" "밥" 선실 위 갑판에서 베트남 선원이 '밥 먹으라'고 불렀지만 안 나갔습니다. '어차피 먹으면 바로 토할 텐데.' 그런데 누워 생각해보니 밥 먹는 장면을 촬영해야 할 것 같더군요. 두개골이 심히 흔들리는 현상이 있었지만, 비틀비틀 계단을 부여잡고 갑판으로 기어 나왔습니다. 흑산도 산물로 끊인 매운탕이 기다리고 있더군요. 입맛이 당기기는커녕 쳐다보기만 해도 속이 미식거렸습니다. 캐논 5D 카메라의 영상 촬영 버튼을 간신히 눌렀습니다. 내려서 보니 초점이 심히 흔들렸더군요. 찍힌 것만 해도 감사해야지요.

아~ 진정한 마린보이들
선실과 갑판을 쉼 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조업하는 선원들은 철인이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흑산도 어민 2명과 베트남 선원 3명의 갑판 위 움직임은 마치 히말라야 산양을 연상시켰습니다. 히말라야 산양은 지구상 최고의 클라이머입니다. 가느다란 발목과 천부적인 균형 감각으로 천 길 낭떠러지를 기어 올라가 한 줄기 풀을 뜯습니다. 선상에서 홍어를 걷어내는 선원 2명, 올라오는 낚싯줄을 걷어 소쿠리에 가지런히 담는 선원들 모두 몸놀림이 산양처럼 가뿐합니다. '쿵쾅쿵쾅' 엔진소리에 맞춰 미싱공장처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철두철미하게 팀플레이를 가동합니다. 게다가 이 공장은 흔들리는 보드판에서 작업이 진행되니 그보다 한 수 위라 할 수 있죠. 진정 위대해 보였습니다.

"선장님, 살려주세요" 
이후부터는 걸낚을 뿌리고, 걷는 작업의 반복입니다. 배를 탄지 8시간을 넘기자 서쪽 수평선 너머로 노을이 발갛게 번졌습니다. 배 멀미가 진동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이내 사위가 어둑해지니 다시 뭍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어서 땅에 발을 딛고 흰 쌀밥과 뜨끈한 국물로 주린 배를 채우고 싶었습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어른들 말씀이 뼈저리게 다가왔습니다. 홍어잡이배를 타겠다고 스스로 손을 들었던 터라 누구 원망도 못 하고 선장 눈치만 살살 살폈습니다.
"선장님, 서너 시간만 조업하고 데려다 주신다더니…."
"이 바닥은 다 마치고 가야지라. 요놈하고 한 바퀴만 더 걷고 갑시다."
허나 상황은 선장에게는 양화, 저에게는 악화일로로 가고 있었습니다. 홍어는 시간이 갈수록 더 잡혔습니다. 오후가 되면서 파도는 잦아져 작업 환경이 더 좋아졌기 때문입니다. 한 마리라도 더 잡고 싶은 어부의 심정을 어찌 탓할 수 있겠습니까. 캄캄한 감방과도 같은 선실에서 하릴없이 기다리는 수밖에요. 면벽수행이 따로 없었습니다.

홍도 2구 풍경. 마을 앞으로 깎아지른 해안 절벽이 자리한다.

홍도 2구 어느 집의 빨래줄 풍경. 옷보다 고기를 주로 말린다.
홍어 날개(왼쪽)와 코. 홍어는 `1코 2날개`를 쳐준다.

12시간 만에 뭍으로
오후 9시. 꼬박 12시간 후에야 뭍에 내렸습니다. 홍도 2구는 홍도 관광객들이 입도하는 홍도 1구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해발 368m 깃대봉의 동쪽 자락과 서쪽 자락에 자리한 두 마을은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1구가 관광지라면 2구는 세월과 단절된 옛 어촌 마을입니다.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시인 곽재구의 『포구 기행』에 나올만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언제 홍도를 갈 생각이면 홍도 1구보다는 2구에 묵어보십시오. 사라져버렸다 생각한 포구 마을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 겁니다.

포구에 내리니, 선장의 식구들이 미리 저녁상을 마련해뒀더군요. 밥상머리 한자리를 차지하고 정신없이 주린 배를 채웠습니다. 얼큰한 물메기탕이 위산으로 가득 찬 뱃속을 달래줬습니다.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은 밥숟가락을 놓자마자 다시 어구를 싣고 거친 바다로 향했습니다. 고된 노동 뒤 한숨도 붙이지 않고 또 바다로…. 위대한 마린보이들에게 경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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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영주 기자 humanest@joongang.co.kr
영상 촬영 김영주 기자, 편집 최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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