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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 레터] 대통령의 차명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017 770 XXXX, 017 770 @@@@….
10년 전 청와대를 출입할 당시 ‘대외비’로 적힌 비서관급 이상의 전화번호는 모두 017 770으로 시작됐다. 뒷 자리 4개 번호를 알면 직책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청와대 비서관들의 전화번호가 이렇게 일률적인 건 보안 때문이다. 공용 업무폰에는 비화 기능도 있다. 경호실이 적용하는 보안 규정에는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차명폰을 썼다는 증언을 정호성 전 비서관이 했다. 그는 “혹시 모를 도청의 위험 때문”이라며 “우리 정치의 아픈 부분”이라고 말했다.

국정감사 때마다 야당에선 도청 의혹을 제기해왔다. 그게 김대중 정부건 이명박 정부건, 보수 정부건 진보 정부건 예외가 없었다. 그 때마다 ‘정부’는 도청이 없었다고 말해왔다. 요즘 들어선 휴대폰 통신기술이 복잡해져 도청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까지 강변해왔다.

그런 마당에 “대통령이 혹시 모를 도청의 위험때문에 차명폰을 썼다”는 정호성의 진술은 당혹스럽다. 대체 이 나라에서 그동안 위정자들이 해온 발언들 중 ‘참’은 어떤 것들인가.

대통령의 차명폰이 당혹스러운 이유는 또 있다. 정호성은 대통령과 차명폰으로 통화한 경우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사실이라면 청와대 경호실 보안 규정을 대통령과 그 핵심 측근 비서관이 무시했다는 얘기다. 청와대 사람들이 업무폰(요즘은 010 4770으로 시작한다)을 쓰는 건 스스로 하는 업무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전 정부 경호실에서 근무했던 아는 이는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도 사생활이 있는 만큼 차명폰을 쓸 수는 있다. 하지만 차명폰으로 업무 얘기를 했다면 보안 규정은 있으나마나한 꼴이 된다. 대통령의 차명폰 사용은 국민들에게 청와대 내부 보안이 그만큼 허술하고, 믿을 수 없는 것임을 공표한 셈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베일이 벗겨지면서 당혹감 때문에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살았건만 이 정부에선 왜 그리 몰랐던 게 많은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뒤 특검은 긴급회의를 열었다. 회의 분위기는 무거웠다고 한다.

하지만 특검이 딛고 있는 땅과 법원이 딛고 있는 땅은 다르다. 오히려 광장의 촛불, 그리고 여론의 지원을 업고 수사를 휘몰아왔던 특검으로선 서늘한 냉정을 찾을 계기이기도 하다. 조의연 판사의 영장 기각 사유에는 법원의 냉정이 담겨 있다.

“뇌물범죄의 요건이 되는 대가관계와 부정한 청탁 등에 대한 현재까지의 소명 정도, 각종 지원 경위에 관한 구체적 사실관계와 그 법률적 평가를 둘러싼 다툼의 여지, 수사 내용과 진행 경과 등에 비춰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타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특검도 신발 끈을 다시 고쳐 맸다고 한다. “영장 기각으로 수사가 끝난 게 아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앞만 보고 가겠다”.

최순실 사태는 좌절과 희망을 동시에 안기며 들풀처럼 사는 이들을 단련시키고 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고,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음를 깨달을 수 있다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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