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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박 대통령의 '아토포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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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양선희 논설위원

양선희
논설위원

팍팍한 세태 속에서도 세상은 기이할 정도로 문학적이다. 대통령과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국민들의 촛불 저항-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진 작금의 ‘비현실적인 현실’ 위로 문득 ‘아토포스(atopos)’라는 단어가 튀어올랐다. 평생 모르고 살아도 무방한 이 말은 정유라의 대리시험 답안지에 ‘아포토스’로 잘못 쓰였으나 정답 처리된 부조리를 빌려 복선처럼 등장했다.

전대미문의 혼란 정국 벗어나려면
대통령, 애국심과 법 존중 보여줘야

 정체가 모호한 공간. 예측하거나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대상. 이질적이고 낯선 것. 이런 의미로 쓰이는 아토포스는 그리스어로 장소를 뜻하는 토포스(topos)에 부정의 접두사 a를 붙여 ‘제자리를 이탈한 것’을 표현한다. 지금 낯설고 모호한 어딘가를 헤매는 우리 사회처럼. 하나 이 말은 좋고 나쁨의 의미는 아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도무지 알 수 없는 독창적인 소크라테스를 일러, 낭만가들이 자신에겐 유일한 의미인 연인을 일러 아토포스라 불렀듯이 긍정 혹은 부정으로 단정할 수 없는 ‘낯섦’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아토포스적 정국’을 긍정·부정으로 단정할 수 없듯이 말이다.

 최근 스스로 ‘꼴보수’를 자처하는 70대 선배를 만났다. “다음 대선엔 속죄의 의미로 1번을 찍지 않을 거야. 평생 1번을 찍는 게 애국인 줄 알았는데 요즘 박근혜 대통령을 보곤 절망해서….” 그는 초기에 태블릿PC가 발견됐을 때만 해도 대통령의 애국심만은 믿었다고 했다. 외로운 인생길에 잘못 만난 친구가 호가호위하는 바람에 함정에 빠졌을 뿐이라고 끝까지 믿고 싶었단다.

 하나 이젠 대통령의 애국심을 믿을 수 없어 절망적이라고 했다. “중국은 사드를 빌미로 압박을 하고, 일본은 무례하게 구는 등 국가 리더십이 흔들리는 틈을 타 이웃 나라들이 한국을 얕잡아 보면서 흔드는데 대통령은 헌재심판 지연 작전이나 펴고, 자기 변명에만 급급하니….” 그는 내게 부탁했다. “대통령이 헌재에 가서 ‘하루빨리 한국에 새로운 리더십이 설 수 있도록 나를 속히 탄핵해 달라’고 하는 게 그나마 나라 안정에 기여하는 마지막 애국이라고 글을 좀 써주면 어떨까.”

 다른 선배는 대통령의 ‘법과 원칙’에 대한 절망감을 보탰다. 그는 지난 1일 기자간담회에서 검찰과 특검의 수사에 대해 “다 엮은 것”이라고 말한 대목에서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니구나’ 했단다. “대통령이 검찰은 자기 편의대로 죄를 엮어서 뒤집어씌우는 곳인 것처럼 말하는데 어느 국민이 사법기관을 신뢰할 수 있겠나.” 최순실은 헌재 증언을 통해 검찰에서 인정했던 혐의를 부인했고, 대통령과 측근들은 예사로 헌재 증인 출석에 불응하거나 증언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우리 사법제도를 조롱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에겐 마지막 보루와 같았던 ‘애국심’과 ‘법과 원칙의 사람’이라는 믿음을 저버리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 ‘아토포스’가 되었다. 그들은 대통령의 탄핵 이후 행동과 대응에 더욱 절망하게 된다고 했다. 안보위기도 아랑곳 않고 사법적 상황을 정치화하면서 반탄핵 세력을 결집하려는 듯한 움직임, 사법적 절차엔 지연 전술을 쓰면서 공격하는 그를 대통령이라 부르기엔 낯설다.

 더구나 지금 우리에겐 리더십 없이 표류할 시간이 없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위기의 안보 상황, 성장 모멘텀을 찾지 못하는 경제, 최악의 청년실업률, 노년층 인구가 유소년 인구를 앞지르는 인구지진(age-quake) 시대의 도래, 인플레이션보다 디플레이션이 걱정인 상황에서도 뛰기만 하는 생활물가…. 온 나라가 힘을 합쳐 필사적으로 돌파해도 쉽지 않는 과제를 앞에 두고 지루한 정치 공방과 소모전으로 지고새선 안 된다.

 박 대통령은 조만간 또 한 번의 기자간담회를 열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만큼은 자연인 박근혜가 아닌 대통령이라는 위치에 걸맞은 마지막 애국심과 법과 원칙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기 바란다. 다신 ‘아포토스’가 정답 처리되는 일이 없기를, 그리하여 지금의 아토포스적 상황이 긍정적인 결말을 맺기를….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