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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억 사재 들여 ‘미혼모 둥지’ 만든 워킹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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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미혼모 시설 자원봉사로 시작해 든든한 후원자가 된 서은교 여성행복누리 이사장. [사진 김춘식 기자]

미혼모 시설 자원봉사로 시작해 든든한 후원자가 된 서은교 여성행복누리 이사장. [사진 김춘식 기자]

무더위가 한창이던 2003년 8월 서울시 마포구의 한 미혼모시설. 앳된 외모의 18세 산모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하루 종일 아이를 꼭 껴안고 있었다. 힘겹게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이 “대신 안아주겠다”고 해도 그녀는 고개를 저을 뿐 아이를 악착같이 혼자 돌봤다. 이 산모의 아이는 다음날 입양기관으로 보내졌다.

여성행복누리 서은교 이사장
14년 전 18세 앳된 산모 보고 충격
매주 미혼모시설 찾아 청소·빨래
입양 않고 엄마가 아이 키울수 있게
광명에 자립시설 ‘아우름’ 열어

이 장면은 당시 지인의 손에 이끌려 자원봉사를 했던 워킹맘 서은교(49·여) 사단법인 여성행복누리 이사장의 뇌리에 깊숙하게 박혔다.

그는 이후 주말마다 미혼모시설에서 보냈다. 산모와 아기들을 돌보고 청소와 빨래도 도왔다. 아기들이 입양기관으로 떠날 때는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면서 미혼모 문제에 관심을 더 갖게 됐다.

서 이사장은 “국내 미혼모 시설의 상당수가 규모가 작은 탓에 아이를 계속 키울 곳을 찾지 못한 미혼모들이 어쩔 수 없이 입양을 선택한다”며 “미혼모들이 직접 아이를 키우고 자립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시설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런 취지에서 서 이사장은 2014년 사단법인 여성행복누리를 설립했다고 한다.

미혼모 돌봄 시설 여성행복누리 아우름 서은교 이사장.[사진 김춘식 기자]

미혼모 돌봄 시설 여성행복누리 아우름 서은교 이사장.[사진 김춘식 기자]

이 꿈은 14년 만에 구체적으로 실현됐다. 17일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에 미혼모를 위한 시설인 ‘아우름’이 개원한 것이다. 지상 1층, 지상 3층 규모로 미혼모와 아기가 함께 지낼 수 있는 생활실과 교육장·식당·놀이방·휴게실 등을 갖췄다. 이 시설엔 최대 40명이 입소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미혼모들의 출산뿐 아니라 산모들이 아이를 직접 키울 수 있도록 돕는다. 그래서 건물 내부도 가정집처럼 꾸몄다. 인근에 보건소가 있어 기형아 검사 등 검진도 편리하게 받을 수 있고 출산 비용도 지원해준다.

엄마들은 이곳에 최장 5년간 머물며 낮에는 학업을 계속하고 밤에는 미용 등 직업교육도 받을 수 있다. 수업 시간에는 별도의 보육교사가 아이를 돌봐준다.

시설을 설립하기까지 우여곡절도 있었다. 서 이사장은 기업 결제대행 업체인 온오프코리아 대표도 맡고 있다. 하지만 복지단체를 운영하려면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있어야 했다. 그는 “미혼모 시설을 만들겠다”는 일념 하나로 공부해 2014년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시설 규모도 당초 계획보다 커졌다. 그가 처음 구상했던 시설은 아파트 등을 임대해 공동 생활터전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입양기관이 미혼모시설을 함께 운영하는 것을 전면 금지하는 한부모가족지원법에 따라 미혼모시설들이 속속 폐지되자 생각을 바꿔 사재 40억원을 내놨다. “시설이 없어지면서 미혼모들이 지낼 곳이 사라져 영아 유기 등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두 아들을 키우는 엄마이자 워킹맘이라 혼자 아이를 키워야하는 미혼모들의 아픔을 이해한다. 서 이사장은 미혼모들이 일할 수 있는 사회적 기업도 설립할 예정이다. 인근에 육가공 공장을 만들어 일자리도 만들겠다는 포부다. 수익금은 전액 미혼모 자립사업에 사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광명=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사진=김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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