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불안 키운 은행 전산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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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기 우리은행장이 지난해 9월 30일 모든 지점에 케이크와 함께 보낸 자축 편지의 한 구절이다. 우리은행은 2200여억원을 들인 첨단 전산시스템을 도입한 후 장애가 3건에 불과했고, 이 중 2건은 즉시 복구됐다며 자랑했다.

그러나 20일 이 '첨단 시스템'은 예상하지 못한 장애에 속수무책이었다. 지점 창구의 단말기 시스템에서 문제가 생기자 담당자들은 원인을 찾느라 허둥댔고, 결국 5시간이나 창구는 마비상태였다. 전문가들은 'IT 강국'인 한국의 주요 은행에서 5시간 가까이 전산장애의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걱정한다.

전산 시스템은 은행 경쟁력의 핵심 요소 중 하나다. 은행 전산 시스템은 특히 첨단 여부보다 얼마나 안정적이냐가 더 중요하다. 그런데도 국내 은행에선 대형 전산 장애가 연례행사처럼 벌어지고 있다. 대부분 대형 은행이 1년에 한두 차례 전산 장애에 시달리는 실정이다.

은행 전산 담당자들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IT 시스템이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은행의 경우 전산 시스템에 1만여 개 프로그램이 들어 있을 정도로 복잡해 '경우의 수'가 너무 많다고 변명한다. 한 은행의 전산 담당자는 "이미 발생한 사고의 재발을 막을 수는 있지만 예상하지 못한 사고는 막을 수 없다"며 "하루하루가 살얼음 위를 걷는 심정"이라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이런 문제의 근본 원인은 은행의 '외형 우선' 사고방식에서 비롯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IT업계의 한 관계자는 "금융회사가 눈에 보이는 서버 등 하드웨어에는 선뜻 투자하면서 잘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 투자에는 인색하다"며 "돈을 쏟아부어 속도.용량 경쟁만 벌일 게 아니라 시스템을 보다 안정시키고 정교하게 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충고했다.

20일 우리은행 창구에서 한 50대 고객은 전산장애 때문에 불편하냐는 질문에 "불편한 게 아니라 불안하다"고 말했다. 고객을 불안하게 하는 곳은 이미 금융회사가 아니다.

김창규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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