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어촌·소외계층 ‘민원 해결사’…마을 변호사·세무사 맹활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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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경기도 화성에 사는 김모(75)씨는 지난달 답답한 마음에 화성시 장안면사무소를 찾았다. 그는 “얼마 전 사고로 먼저 간 아들에게 빚이 1000만원이 있는데 나에게 갚으라고 한다”며 난감한 표정으로 해법을 호소했다. 상담을 맡은 한 변호사는 “아들이 빚 외에 다른 재산을 남긴 게 없다면 상속을 포기해도 된다. 그럼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차분하게 설명해 줬다. 김씨는 “그렇게 해도 되느냐”며 수차례 되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변호사의 얼굴을 확인한 뒤에야 김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변호사 2580명, 세무사 1189명 등
매월 읍·면·동 돌며 무료 민원 해결
사기 등 법률상담 3년간 3414건
세무상담은 6개월 만에 1만4180건
“사각지대 많아 보완·확대 필요”

#부산 해운대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최모(54·여)씨는 식재료를 구입한 증빙서류가 없어 100만원 상당의 부가가치세를 내야 할 상황에 처했다. 최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청을 방문했다. 자문 담당 세무사는 “매입세액 확인은 영수증뿐만 아니라 세법 규정에 따라 신용카드 매출전표로도 가능하다”고 조언해줬다. 최씨는 이후 30만원만 납부해 세금을 아꼈다.

법률과 세금 관련 상식을 몰라 전전긍긍하던 주민들이 ‘마을변호사’와 ‘마을세무사’ 제도를 통해 쏠쏠하게 도움을 받고 있다. 변호사와 세무사는 재능 기부를 해서 보람이고, 영세상인과 농촌지역 주민 등 사회적 약자들은 법률 고민과 세금 문제를 무료로 해결해 도움을 받고 있다. 변호사와 세무사들은 평소 전화와 인터넷 상담을 받고, 한 달에 한 번 읍·면·동사무소를 직접 찾아간다.

16일 법무부와 대한변호사협회(변협)에 따르면 상주 변호사(또는 등록 변호사 사무소)가 한 명도 없는 전국의 무변촌(無辯村)과 변호사가 한 명 정도인 소외 지역을 중심으로 마을변호사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마을변호사는 법무부가 2013년 6월부터 운영하다 지난해 6월부터 변협과 함께하고 있다.

전북지방변호사회 소속 이덕춘 마을변호사가 지난 9일 전북 완주군 봉동읍사무소에서 주민에게 무료 법률상담을 해주고 있다. [완주=프리랜서 장정필]

전북지방변호사회 소속 이덕춘 마을변호사가 지난 9일 전북 완주군 봉동읍사무소에서 주민에게 무료 법률상담을 해주고 있다. [완주=프리랜서 장정필]

무변촌은 전국에 1524곳이나 된다. 실제 전북 완주군은 인구가 9만5303명이지만 등록된 변호사가 한 명도 없다. 김제시는 8만8721명이 살지만 변호사는 단 한 명뿐이다.

법무부는 이에 따라 경북 200여 명, 전북 255명, 경기도 360여 명을 비롯해 전국의 무변촌에 각각 1~2명씩 모두 2580명의 마을변호사를 지정·운영하고 있다.

상담은 소소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손자 부탁으로 신용카드를 발급해 줬다가 나중에 감당할 수 없는 카드사용료 때문에 고민하는 노인부터 음주운전 벌금 납부, 종중 땅 소송, 부동산·보험 사기 피해 등이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 3년간 3414건을 상담했다. 전화·인터넷 상담을 포함하면 건수는 2~3배 늘어난다. 2015년 7월부터 전북지역 마을변호사로 활동해 온 이덕춘(42·로스쿨 3기) 변호사는 “주민들이 법률 상식 부족으로 막혔던 부분을 함께 고민하며 해법을 찾아 준다는 점에서 보람이 크다”며 “아버지 같은 어르신들이 상담 후에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일 때는 수임료 이상의 뭉클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 도입된 ‘마을세무사’제도도 호응이 좋다. 행정자치부와 한국세무사회가 지방자치단체와 협약을 맺고 전국에서 1189명의 세무사가 참여하고 있다. 실생활과 밀접한 세금 문제를 쉽게 풀어주다 보니 상담 건수가 6개월 동안 1만4180여 건이나 됐다.

울산시 남구에서 활동 중인 김미경 마을세무사가 지난해 7월 남구 옥동주민센터에서 민원인에게 세무상담을 하고 있다. [사진 울산광역시]

울산시 남구에서 활동 중인 김미경 마을세무사가 지난해 7월 남구 옥동주민센터에서 민원인에게 세무상담을 하고 있다. [사진 울산광역시]

울산의 상담건수는 전국 평균의 2배나 된다. 56개 읍·면·동에 32명의 마을세무사들이 지난해 6~11월 1인당 평균 21.2건의 상담 실적을 올렸다.

홍윤식 행정자치부장관은 “앞으로도 자치단체 및 세무사회의 민관 협력을 활성화하겠다”며 “더 많은 주민들이 마을세무사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마을세무사와 달리 마을변호사의 경우 여전히 사각지대가 많다는 지적이다. 마을변호사의 업무가 법무부와 변협, 지방변호사회, 지자체 등 4곳으로 나뉘어 있어서 홍보가 잘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자체에 전담부서를 마련해 홍보를 일원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 지역에 한 명의 변호사를 지정해서는 상담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며 “변호사들에게 의무적으로 주어지는 공익활동(1년 평균 10시간)에 마을변호사도 포함시키자”고 제안했다.

수원·울산·전주·대구=임명수·최은경·김준희·김정석 기자 lim.myoungs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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