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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식 성인 못잖아” vs “여론에 휩쓸리기 쉬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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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호 6 면


만 18세로 선거연령을 낮추느냐 마느냐는 정치권에서 20년 넘게 이어져 온 해묵은 논쟁이다. 주로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논쟁에 불이 붙지만 여야 입장이 엇갈리면서 결국 유야무야되곤 했다. 그런데 올해 만 18세가 되는 1999년생들의 움직임이 좀 심상찮다. 예비 고3 혹은 예비 대학 신입생인 이들은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고에 이어 지난해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촉발한 대규모 촛불집회, 대통령 탄핵안 가결 등 정치·사회적으로 큰 사건들을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정치 참여와 리더의 중요성 등을 주제로 한 대화가 일상에 스며들었다.


중앙SUNDAY는 ‘고3 투표권’을 둘러싼 만 17·18세 학생들의 의견을 두루 들어봤다. 선거연령 인하에 대한 찬반 입장을 떠나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었고 나름의 논리도 명확했다. 기성세대가 탁상공론에 머물러 있을 때도 이들은 직접 여론을 모으거나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곤 했다.

[촛불 세대, SNS 통한 정치 참여 활발]
지난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 청소년 시민단체 ‘틴즈디모(Teenager+ Democracy)’ 회원인 고교생 10여 명이 만 18세 이상에게 투표권을 달라며 기자회견을 했다. 이후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회의실을 찾아가 “선거법 개정안을 조속히 심의해 달라”며 침묵시위를 벌였다. 딱딱한 피켓 대신 스케치북과 손글씨를 이용하자는 등의 아이디어는 40여 명이 참여하는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틴즈디모 소속인 이용기(18·덕소고 3년)군은 “고3인데 입시 준비로 바쁘지 않겠느냐, 정치인들이 선거 유세한다고 학교에 오면 학업에 지장이 많을 거다 라는 등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학생이기 전에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주권을 행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올해 선거권이 생긴다면 청렴하고 소통의 리더십을 가진 대통령을 뽑고 싶다”고 말했다.


이군은 중학생 때부터 정치 이슈에 관심을 가져왔고 최근에는 촛불집회에 참가해 공개 발언도 했다. 고1 때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만 18세 투표권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한 적도 있다.


지난 7일 오전 10시 서대전고등학교 다목적교실. 대전 서부 지역 고등학교 연합 토론 동아리 회원 35명이 선거연령 인하를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책상 위에는 지난 한 주 이들이 직접 9개 학교 예비 고2·3년생 182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가 놓여 있었다. 선거연령을 만 18세로 낮추는 데 찬성한다는 응답은 55.2%(1005명), 반대는 44.8%(817명)였다.


학생들은 이 같은 여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3시간 동안 난상토론을 벌였다. 선거연령을 낮추는 데 반대한다는 이재형(17·서대전고 2년)군은 “쉬는 시간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본 기사나 동영상이 화제에 오르곤 한다”며 “지금은 SNS나 주위 사람들의 의견에 영향을 많이 받는 시기인 만큼 스스로 정치적 의사를 확립할 나이가 됐을 때 선거권을 갖는 게 좋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군도 청소년들의 정치 참여 자체를 반대하진 않았다. “초·중등 과정에서 자유학기제 수업 등을 통해 다양한 정치 경험을 쌓게 한 뒤 선거연령을 낮춰도 늦지 않다”는 얘기다.

[86세대 부모와 자유롭게 정치 대화]
만 18세는 스마트폰과 SNS 활용에 익숙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이기도 하다. 이들이 중학교 1·2학년 무렵인 2012년 8월 국내 스마트폰 가입자 수는 3000만 명을 돌파했다. 이 중 미성년자는 300만 명가량이었다. 청소년들은 정부 정책이나 사회 현안에 대한 불만을 제기할 때도 집회·시위 참여나 서명운동보다는 SNS에 글을 올리거나 댓글을 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지난해 6~8월 만 15~39세 남녀 2534명을 대상으로 면접조사를 실시한 결과다.


반대 의견을 제시할 때 SNS를 활용하겠다는 응답은 전체의 33.5%였는데 이 중 만 15~18세가 46.3%로 가장 높았다. 만 19~29세는 35.2%, 만 30~39세는 27.6%로 나이가 들수록 SNS 의존도가 낮아졌다. 만 18세 이하의 경우 집회·시위 참여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겠다는 응답은 14.8%, 서명운동에 참여하겠다는 응답은 37.7%로 SNS 활용도에 못 미쳤다.


최다혜(18·순천매산여고 3년)양은 JTBC 시사예능 프로그램인 ‘썰전’을 애청하고 수시로 모바일 기기나 SNS로 정치 뉴스를 소비한다. 최양은 “주요 신문 사설을 추천해 주는 앱을 애용하고 페이스북에서 많이 공유되는 기사와 칼럼도 관심 있게 읽곤 한다”며 “정치에 무관심한 어른도 많은데 차라리 저처럼 정치에 관심을 가진 청소년들이 투표에 참여한다면 더 나은 선거 결과를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한편 이인구(18·한영외고 3년)군은 “페이스북에 허위정보도 많아 청소년들의 정치적 판단력을 흐린다”고 반박했다.


대학 입학을 앞둔 박가원(18·성남외고 졸업 예정)양은 친구들과 대선에 대한 얘기를 할 때마다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낀다. 대부분의 친구들과 달리 99년 2월생인 박양은 현행법상 올해 대선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양은 “만 18세가 성인보다 정치적 판단력이 흐리기 때문에 투표 권한을 줄 수 없다는 주장은 이해하기 어렵다”며 “부모님도 저에게 정치 참여를 권장한다”고 말했다.


만 18세 학생의 부모는 대체로 86세대(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로 분류된다. 김서연(18·경기수원외국인학교 12년)양은 “부모님과도 정치 현안에 대해 자유롭게 얘기하는 편”이라며 “SNS의 발달로 청소년과 성인들이 획득하는 정보의 양과 질이 점점 더 비슷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양은 “잘못은 대통령이 해도 부끄러움은 내 몫이더라”며 “내 손으로 좋은 대통령을 뽑자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고도 말했다.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고와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등 굵직한 정치적 사건들도 99년생들의 ‘정치 학구열’을 높였다. 배다연(18·이화여고 3년)양은 “세월호 사고를 계기로 리더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달았다”며 “지난해 총선 때도 어떤 후보가 좋은 공약을 내놨는지 친구들과 얘기를 많이 나눴다”고 말했다.


정한울 고려대 연구교수는 “만 18세는 민주주의 제도하에서 태어났고 개인주의 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에 권위주의나 가부장제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라며 “이들을 진보나 보수라는 잣대로 이분화하려 하지 말고 투표를 통해 정치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화되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동석 한국교총 교권정책본부장은 “고3 교실의 정치 선거장화를 막을 법적 근거가 먼저 마련돼야 한다”며 신중한 입장을 나타냈다.

[외국서도 선거연령 인하 유불리 엇갈려]

지난 13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선거연령 인하에 대한 찬성 여론이 3년 전보다 훨씬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2014년 2월 조사에선 찬성 35%, 반대 56%로 부정적인 여론이 높았지만 올해는 찬성 49%, 반대 48%로 오히려 찬성이 높았다.


대선이 예정대로 올해 12월 치러질 경우 만 18세에 해당되는 유권자(98년 12월~99년 12월생)는 62만여 명이다. 만약 4월에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면 22만여 명이 이에 해당된다. 역대 대선에서 39만 표(97년 15대 대선), 57만 표(2002년 16대 대선) 차로 승패가 갈렸던 걸 감안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유권자 수다.


지난 9일 국회 안행위 소위는 선거연령을 만 19세에서 만 18세로 하향 조정하는 방안이 담긴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하지만 11일 안행위 전체회의에서는 새누리당과 바른정당이 여야 간사 합의가 없었다며 제동을 걸었다. 이후 바른정당은 당초 찬성 입장에서 한발 물러선 이유가 뭐냐며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바른정당 장제원 대변인은 “야당이 요구하는 것만큼 시급한 개혁법안이 아니란 것이지 선거연령 인하에 무조건 반대한다는 뜻은 아니다”며 “당 지도부 선출 이후 2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해도 늦지 않다”고 해명했다.


선거연령 인하가 진보 성향의 정당에 유리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일단 해외 사례를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일본은 2015년 선거연령을 만 20세에서 만 18세로 낮췄지만 이듬해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 신조 총리가 속한 보수 여당에 표가 쏠렸다. 당시 아사히신문은 “젊은 층일수록 여당에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독일에서는 72년 총선 때 진보 성향의 사민당이 사상 최초로 원내 제1당이 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게 선거연령을 만 18세로 낮춘 것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반면 95년에는 사민당 주도로 일부 주가 투표연령을 만 16세로 낮췄는데 정작 이듬해 지방선거에서 사민당 득표율이 가장 낮게 나왔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우리나라는 2005년 선거연령을 만 19세로 낮췄지만 이후 총선에서 보수 성향 정당이 승리했다”며 “여야가 선거 유불리를 떠나 젊은 층의 투표율을 끌어올리는 방안의 하나로 선거법 개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박인환 건국대 교수는 “만 18세에 선거권을 주면 실수로 돈을 받는 등 선거법을 위반할 소지도 생긴다”며 “투표를 권리라고만 생각하기 쉬운데, 미성년자에게 술·담배 판매를 금지하는 것처럼 선거연령 제한도 청소년 보호 장치 중 하나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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