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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것으로 가득했던 10대의 나, 더 없이 아프고 강렬했던 감정속으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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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호 8 면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의 저녁 하늘에서 별이 흘러내린다. 거뭇거뭇한 구름 사이를 뚫고 빛 조각을 흩뿌리며 낙하하는 혜성. 그리고 그런 하늘을 아파트 옥상에서 바라보는 소년의 작은 뒷모습. 보는 이의 숨을 멈추게 만드는 이 아름다운 순간, 애니메이션 팬이라면 그림만 봐도 알아차릴지 모른다. “저런 장면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신카이 마코토밖에 없어!”


지난 4일 국내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新海誠·44)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君の名は.)’의 인기가 뜨겁다. 몸이 뒤바뀐 소년과 소녀를 주인공으로 인간과 인간의 이어짐과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이미 지난해 여름 일본에서 개봉해 큰 성공을 거뒀다. 16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이 작품을 보았고 219억3070만 엔(약 2267억원) 이상의 흥행 수익을 올리며 역대 일본 개봉영화 흥행 순위 4위, 일본 영화로는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감독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이 신드롬은 한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개봉 일주일 만에 148만 명이 봤고, 15일에는 200만 관객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터넷에는 “10번째 봤다” “인생 최고의 작품”라는 열성팬들의 ‘간증’이 이어진다. 무엇이 이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걸까. 독보적 감수성과 비주얼로 무장한 ‘신카이 월드’를 이해하기 위한 세 가지 키워드.


우선 줄거리부터. ‘너의 이름은.’은 시골 마을 이토모리마치에 사는 여고생 미쓰하와 도쿄에 사는 고등학생 다키의 이야기다. 답답한 산골 마을,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신사(神社) 의식을 주관하는 임무까지 맡은 미쓰하는 “다음 생엔 도쿄의 꽃미남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빈다. 어느 날 미쓰하는 소원처럼 도쿄에 사는 남학생이 된 꿈을 꾸고, 같은 날 다키 역시 가본 적 없는 작은 마을의 여고생이 된 꿈을 꾸게 된다.


같은 꿈이 반복되고, 결국 자신들이 꿈속에서 ‘몸이 바뀌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두 사람. 서로에게 주어진 낯선 삶을 즐기며 휴대전화 일기로 교류하지만 1000년 만에 혜성이 일본에 근접하는 날, 꿈은 멈춰버린다. 두 사람이 특별하게 이어져있다는 걸 느낀 다키는 미쓰하를 만나러 이토모리마치로 떠나고 이 마을에서 일어난 재앙과 직면하게 된다.

[빛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배경왕’]
신카이 감독은 팬들 사이에서 ‘배경왕’으로 불린다. 그의 작품 주인공은 사실 인물이 아니라 배경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흰 구름이 몽실몽실 떠 있는 한낮의 도시, 벚꽃이 흩날리는 거리, 사람으로 가득한 신주쿠역 등 그림 같은 장면이 교차편집되며 말이 없는 주인공들의 감정을 대신한다. 특히 빛과 그림자를 세밀하게 묘사해 사진보다 더 리얼하고 감성적인 화면을 만들어내는 게 강점. 실제 장소를 작품 속 배경으로 택해 관객들의 몰입도를 높이는 것도 특징이다. ‘초속 5센티미터’ 개봉 당시 신카이 감독은 “한 달간 제작팀이 애니메이션의 배경이 되는 지역을 돌며 2만 장이 넘는 사진을 찍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너의 이름은.’ 역시 배경이 압도적으로 아름답다. 시골 마을의 생기 있는 풍경은 물론이고 다키가 살고 있는 신주쿠 인근의 낮과 밤을 공들여 묘사한다. 개봉을 앞두고는 사진을 신카이 감독의 애니메이션풍으로 바꿔주는 앱이 공개돼 인기를 끌다 저작권 문제로 서비스가 중단되기도 했다.


일본 나가노현에서 태어난 신카이 감독은 고등학교 때 왕복 1시간 반이 걸리는 학교를 늘 기차로 통학했다고 한다. “전차에서 책을 읽다가 바깥 풍경을 놓치는 게 아까워 등·하굣길엔 내내 창밖만 바라봤다. 계절과 시간에 따라 하늘도 나무도 완전히 다른 색으로 변하는 걸 보는 게 좋았다. 그때 눈과 마음에 담아놓은 풍경과 감성이 지금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자산이 됐다.”(‘너의 이름은.’ 관객과의 대화 중)

신카이 마코토 감독 필모그래피
▶그와 그녀의 고양이 (1999) 신카이 감독이 각본ㆍ감독ㆍ영상ㆍ성우 역할까지 맡아 제작한 5분짜리 흑백 애니메이션. 게임회사에서 일하던 신카이 감독이 매일 퇴근 후 작업해 완성했다. 도시에서 독신 생활을 하는 여성과 고양이의 일상을 잔잔하게 그렸다.


▶별의 목소리 (2002) 역시 음악을 제외한 대부분의 작업을 감독 혼자 했다. 평범한 중학생 노보루와 우주 괴생명체를 추적하는 국가연합 멤버로 선발돼 우주로 떠난 소녀 미카코의 이야기. 신카이 감독을 세상에 알린 작품으로 제1회 도쿄국제아니메페어21 공모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2004) 제2차 세계대전 후 연합군이 지배하는 홋카이도와 나머지 지역으로 분단된 가상의 일본이 배경. 원인불명으로 잠에 빠진 친구 사유리를 깨우기 위해 아오모리 지역에 사는 두 소년이 홋카이도로 비행하는 계획을 세운다. 캐나다 판타지아 영화제 애니메이션 영화 부문 은상 수상.


▶초속 5센티미터 (2007) 관계와 인연을 소재로 한 3개의 단편을 모았다. 신카이 감독 특유의 아름다운 풍경 묘사가 절정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 ‘초속 5센티미터’는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다.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최우수애니메이션상, 이탈리아 퓨처필름영화제 란치아·플라치나 그랑프리를 받았다.


▶별을 쫓는 아이: 아가르타의 전설 (2011) 설화에 등장하는 땅속 세계 아가르타를 찾아 떠난 소녀 아스나의 모험담을 그렸다.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집중했던 전작들에 비해 탄탄한 서사가 강화된 판타지물이다. 제8회 중국국제동만절 ‘금후상’ 우수상 수상.


▶언어의 정원 (2013) 구두 디자이너를 꿈꾸는 고등학생 다카오와 학생들과의 관계로 방황하는 문학 교사 유키노의 만남과 이별을 그렸다. 비가 내리는 신주쿠 공원의 풍경이 환상적으로 그려진다. 제18회 애니메이션 고베 작품상, 독일 슈투르가르트 국제애니메이션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

[그 시절의 감성, 그리고 ‘무스비(結び)’]
신카이 감독이 만들어낸 ‘그림’에 관객들이 이견 없이 열광한다면 스토리는 살짝 호오가 갈린다. 누군가는 여백 넘치는 애잔함에 매혹되는 반면, 일부는 “중2병스럽다”며 사춘기 감수성에 녹아들기 어렵다고 말하기도 한다.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초속 5센티미터’ 등 전작의 대부분은 사춘기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를 주인공으로 한다. 지금 떠올리면 유치하지만, 당시엔 더없이 아프고 강렬했던 그 감정 속으로 관객들을 몰아넣는다.


사춘기 소년·소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들을 주로 만든 데 대해 감독은 여러 인터뷰에서 “나이를 먹으면서 감정이 많이 무뎌지고 있지만 작품을 만들 때만은 많은 것이 눈부시고 신선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의 나로 돌아가려 한다”고 말했다. 주인공들이 서로 좋아하지만 대체로 맺어지지 않는 것은 “내 자신이 소극적이고 인기가 없는 소년이었기 때문”이라고.


‘너의 이름은.’에서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 그리고 기억이라는 기존의 주제가 한층 강화됐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할머니의 대사, “실을 잇는 것도 무스비, 사람을 잇는 것도 무스비, 시간이 흐르는 것도 무스비”라는 대사는 3·11 동일본 대지진으로 거대한 죽음과 이별을 경험한 일본인들을 향한 따뜻한 위로로도 들린다. ‘무스비’는 일본어로 ‘매듭, 맺어짐, 인연’이라는 뜻. 김세준 애니메이션 평론가는 “신카이 감독이 그간의 작품에서 꾸준히 보여준 감수성과 ‘관계’라는 주제가 이번에는 탄탄한 서사에 힘입어 많은 사람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간 것이 ‘너의 이름은.’의 성공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오타쿠’, 그 이상]
신카이 감독은 대학을 졸업하고 게임 회사에서 일하며 혼자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시작했다. 초기 작품에선 음악 정도를 제외하고 자신이 모든 작업을 도맡아 했다. 그렇게 장인정신이 녹아든 작품을 하나하나 발표하며 열광적인 소수의 팬들을 확보해 나갔다.


2013년 ‘언어의 정원’ 이후 “다수에게 사랑받는 대중적인 작품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뒤에는 적극적으로 다른 아티스트들과 협업했다. 특히 ‘너의 이름은.’에는 스튜디오 지브리 출신으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원령공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에 참가한 작화 감독 안도 마사시(安藤雅司)와 ‘그 여름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등을 만든 신예 애니메이터 다나카 마사요시(田中?賀)가 참여했다. 그 결과 “신카이 감독이 가진 마이너한 개성과 메이저한 표현력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작품”이란 평을 받았다.


신카이 감독의 작품은 큰 범주 내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흐름 중 하나인 ‘세카이계(セカイ系)’적 특징을 갖고 있었다. 안노 히데아키(庵野秀明) 감독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대표되는 세카이계는 ‘평범한 일상을 살던 소년과 소녀가 우주적 위기 속에서 세계를 구한다’는 유의 스토리를 가진 작품들을 일컫는다. 신카이 감독도 그동안 작품 속에서 별과 우주, 지하 세계, 시간과 공간의 어긋남 등 SF적 요소들을 다뤄 왔다. ‘너의 이름은.’에서는 이런 요소를 품으면서도 캐릭터나 서사의 외연을 확장시킴으로써 ‘오타쿠’뿐 아니라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 데 성공했다.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는 “그의 오랜 지지층인 오타쿠의 취향에 많은 세대와 계층이 공감할 수 있는 ‘지브리 감성’을 함께 담았다”고 평가했다. 신카이 감독은 한국 개봉을 기념해 열린 국내 관객과의 대화에서 “‘너의 이름은.’을 만들면서 그동안 내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부분, 예를 들면 작품으로 사람을 웃기는 것 등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며 “앞으로도 인간의 희로애락을 모두 품은 작품을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 미디어캐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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