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15. 첫 음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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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비틀스의 인기에 자극을 받아 4인조 그룸 ‘애드훠’를 결성하고 1집 ‘비속의 여인’을 발표했다.

이교숙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1984년 선생님의 환갑 잔치가 마지막인 듯하다. 잔치는 북적댔다. 음대 교수부터 오케스트라 지휘자, 연주자 등 유명 클래식 음악인들이 홀을 꽉 채우고 있었다. 대중음악인은 나뿐이었다. 멋쩍어서 서 있기조차 마땅치 않을 정도였다. 저 높은 자리에 선생님이 앉아 계셨다. 피곤한 듯 졸고 있는 기색이었다. 인사를 했더니 선생님은 깜짝 놀라시며 나를 반겼다.

"내 옆으로 빨리 와라."

그때부터 선생님 얼굴에 생기가 도는 듯했다. 나중에 행사 주최 측 관계자가 내게 조용히 물었다.

"아니, 선생님이 기운 없이 계시다가 왜 신중현씨가 오니까 저렇게 바뀌시죠?"

내가 선생님을 존경하는 만큼 선생님도 나를 아끼신 것으로 짐작한다. 73년 서유석이 부른 '선녀'에 선생님의 하프 연주가 들어가 있다. 당시 나는 서유석과 양희은의 앨범을 제작하고 있었다. 통기타 음악을 하는 친구들이라 록 비트는 맞지 않아 20인조 오케스트라를 썼다. 신비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 선생님에게 하프 연주를 부탁했다. 노래를 들어보신 선생님은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당시 나는 몽환적이고 파격적인 사운드에 심취해 있었다. 선생님은 클래식과 재즈에 정통한 분이라 그런 연주는 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내 음악성을 이해하고 기꺼이 연주해 줬다. 선생님에게 작곡을 배울 때도 나는 숙제로 파격적인 곡을 써내곤 했으니까.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에 일반 무대에도 쉽게 진출할 수 있었다. 60년대 초부터 미 8군 무대는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바깥 세상 물가는 자꾸 올라가는데, 미 8군에서 주는 출연료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사는 20~30명이던 쇼 인원을 열 명 안팎으로 줄이는 식으로 수지를 맞췄다.

나는 4인조 패키지 쇼 그룹인 '클럽 데이트'를 구성했다. 비틀스가 탄생하기 전인 62년이었다. 테너 색소폰을 불던 신지철, 드러머 김대환과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뭉쳤다. 우리를 필두로 미 8군 주변에는 몇 명으로 이뤄진 소형 밴드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미 8군에 더 이상 기대할 게 없었다. 클럽 데이트를 해체하고 일반 무대용 4인조 그룹 '애드훠(Add4)'를 결성했다.

63년 영국의 비틀스가 첫 싱글 앨범을 내고 전 세계에 선풍을 일으켰다. 사실 나도 그런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먼저 서양식 모던 록을 선보인 것이다. 사실 4인조 밴드는 내가 먼저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비틀스의 음악성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나는 비틀스식 록을 한국식으로 구상하기 시작했다. 더 늦기 전에 음반을 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여러 음반사에 얘기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 음반사는 곡 수가 많아야 음반을 내줬다. 국내에서는 CD시장이 거의 몰락한 최근에야 싱글 앨범 제도가 활성화되지 않았던가. LP판을 빼곡히 채우느라 작곡과 연주 준비에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해 64년 탄생한 게 '비속의 여인'이 담긴 애드훠의 1집이었다. 그 음반을 준비하느라 미 8군 생활까지 접었다.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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