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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치유, 희망…연둣빛 세상 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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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사진 팬톤]

[사진 팬톤]

해마다 연말이면 그 다음 해 유행할 색을 예측하는 발표가 이어진다. 글로벌 색채 전문 기업은 물론 화학 회사와 페인트 업체 등이 ‘올해의 컬러’를 비롯한 컬러 트렌드 전망을 내놓는다. 지난해 12월 미국의 색채 전문 기업 팬톤이 ‘2017년 올해의 색’으로 초록 계열의 그리너리(Greenery)를 선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색이 선정되면 디자인 전문가의 손을 거쳐 가구·패브릭 같은 홈 인테리어, 패션·화장품·식품·가전·자동차 등 생활 분야 전반에 적용된다.

2017년 유행색 ‘그리너리’
“사회·정치적 혼란에 마침표를”
올해의 색엔 사람들의 마음 담겨
슈트, 메이크업 베이스, 자동차…
다양한 그린톤의 신제품 봇물

대체 무슨 기준으로 이런 전망을 내놓는 것일까. 색채 기업들은 각자의 연구와 사유를 토대로 주목할 만한 색을 선정한다. 예측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시대정신이다. 팬톤은 “사회현상을 반영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태도나 감정을 대변하는 색을 선택한다”고 설명했다. 올해는 팬톤뿐 아니라 여러 색채 예측 기관들이 초록색을 올해의 색으로 꼽았다. 초록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희망’ ‘새로운 시작’ ‘자연에 가까운 삶’을 갈망하는 목소리를 반영한 것이다.

팬톤이 올해의 색으로 꼽은 그리너리는 노란빛을 띠는 초록색이다. 식물의 잎사귀에서 볼 수 있는 밝고 싱그러운 느낌을 담았다. 팬톤 측 표현은 “움트는 봄날의 새싹을 연상시키는 신선하면서 강렬한 옐로 그린색”이다.

그리너리는 정치·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지난해를 정리하고 2017년에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자는 팬톤의 선택이었다. 리트리스 아이즈먼 팬톤 색채연구소장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사회·정치적 혼란 속에 스트레스와 긴장감이 이어지는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그리너리는 희망, 그리고 자연과의 교감을 의미한다”며 “성공과 행복의 기준을 재정립해야 하는 시점에 편안하면서도 확신에 찬 색감을 지닌 그리너리는 자신감과 담대함을 보여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로리 프레스만 팬톤 부사장은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테크놀로지와의 연결을 끊고 싶은 욕망이 점점 강렬해지는 현대인에게 이젠 쉼이 필요할 때라는 메시지를 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패션 디자이너 비비언 웨스트우드의 “(물건을) 적게 사고, 잘 고르고, 오래가도록 관리하라”는 철학도 그리너리 선택에 반영했다고 한다.

연두색 조끼와 드레스를 선보인 마이클 코어스 2017 SS 컬렉션(左), 진하고 연한 톤의 초록색을 섞은 코트 를 선보인 구찌 2017년 봄·여름(SS) 컬렉션(右). [각 브랜드]

연두색 조끼와 드레스를 선보인 마이클 코어스 2017 SS 컬렉션(左), 진하고 연한 톤의 초록색을 섞은 코트 를 선보인 구찌 2017년 봄·여름(SS) 컬렉션(右). [각 브랜드]

팬톤뿐 아니라 영국의 컬러마케팅그룹(CMG)도 올해 주목해야 할 색으로 초록색을 꼽았다. CMG는 대륙별로 나눠 올해의 색을 발표한다. 북미 지역에서는 이끼를 연상시키는 황록색 계열의 스라이브(Thrive)를 선정하면서 인내심·장수·건강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유럽에서도 청보리 또는 오이를 연상시키는 연녹색을 라이프 스퍼트(Life Spurt)라는 이름을 붙여 올해의 색으로 꼽았다. 아시아에서는 물에서 영감을 얻은 블루 그린색 에도 오(Edo Eau)를 꼽았다.

반면에 패션에 강점을 지닌 프랑스 색채기업 넬리로디는 창백한 우주의 암석을 연상시키는 회색와 청록색, 도심 속 정글을 연상시키는 핑크와 갈색 등 다양한 색상을 제시했다. 네덜란드 페인트 회사 듀럭스는 탁한 청색인 데님 드리프트를 올해의 색으로 선택했고, 독일 화학 회사 머크 역시 청색을 띄는 바이올렛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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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이든 블루든 컬러 트렌드엔 상징성이 담긴다. 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세계 곳곳의 거리 패션과 건축·영화·디자인·소셜미디어·테크놀로지 등을 둘러보며 정치·경제·사회적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한 뒤 토론을 거쳐 의미 있는 색을 고른다. 이 때문에 컬러 트렌드 전망은 색 자체가 갖는 심미적 요소뿐 아니라 색을 통해 시대적 요구와 메시지를 전파하는 기능을 한다. 색채 전문가인 김명진 SADI 교수는 “단지 시각적으로 예뻐서 유행할 색이라고 전망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변수를 고려해 제안하는 개념”이라며 “팬톤의 그리너리도 친환경, 자연, 다시 시작이라는 철학적 태도를 보여주는 선택”이라고 말했다.

1963년 미국 뉴저지에서 출범한 팬톤은 색 표준화 시스템을 개발해 색에 관한 범 세계적 기준을 제시했다. 새로 만들어서 이름 붙인 고유의 색을 4000종 넘게 보유해 ‘색채의 권력’으로 불린다. 올해의 색은 2000년 이후 해마다 발표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로즈쿼츠(핑크)와 세레니티(하늘색)를 선정하면서 젠더리스와 휴식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초록색을 적용한 메르세데스-벤츠의 2018년형 스포츠카 ‘메르세데스 AMG GT R’. [각 브랜드]

초록색을 적용한 메르세데스-벤츠의 2018년형 스포츠카 ‘메르세데스 AMG GT R’. [각 브랜드]

예측처럼 올해 출시되는 패션과 뷰티 신제품에서 그리너리색이 눈에 띄게 늘었다. 구찌, 겐조, 발렌시아가, 마이클 코어스 등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는 2017년 봄·여름(SS) 컬렉션에 그리너리에서 영감을 받은 옷을 선보였다. 구찌는 초록색 바지와 초록이 섞인 플로럴 프린트의 슈트를 내놓았다. 패션쇼 런웨이도 초록색 카펫으로 덮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올해 신차 ‘2018년형 AMG GT R’을 초록색 모델로도 내놓는다. ‘AMG 그린 헬 마그노’라고 이름 붙인 이 모델은 애니메이션 주인공 슈렉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초록색이다. 국내 색조화장품 브랜드 VDL은 이달 초 그리너리를 주제로 한 ‘2017 VDL+팬톤 컬렉션’ 11종을 출시했다. 피부색을 보정하는 메이크업 베이스 ‘톤업 쿠션’과 그리너리를 포함한 12가지 컬러를 담은 아이섀도 팔레트 등이다.

왼쪽부터 연둣빛 과 상큼한 향의 샤넬 향수 ‘샹스 오 후레쉬’, 메이크업포에버 초록색 아이섀도우, 팬톤 올해의 색을 적용한 VDL의 틴티드 립밤 ‘립엑스퍼트 컬러 립큐브마블’. [각 브랜드]

왼쪽부터 연둣빛 과 상큼한 향의 샤넬 향수 ‘샹스 오 후레쉬’, 메이크업포에버 초록색 아이섀도우, 팬톤 올해의 색을 적용한 VDL의 틴티드 립밤 ‘립엑스퍼트 컬러 립큐브마블’. [각 브랜드]

이가희 VDL 마케팅 담당은 “색조화장품 전문 브랜드로서 트렌드를 이끌기 위해 2015년부터 팬톤 컬러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며 “지난해에 로즈쿼츠와 세레니티를 메인 컬러로 한 메이크업 제품은 2015년 팬톤 컬렉션보다 매출이 118% 증가하는 등 점점 반응이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노루페인트는 그리너리색을 인테리어용 페인트로 판매한다.

올해의 컬러 선정은 색에 대한 편식을 유도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다양한 색을 접하는 방법이 된다. 김명진 교수는 “세상에 존재하는 색이 너무 많고 다채롭기 때문에 무엇을 사용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수 있는데, 컬러 전문가의 안내를 통해 새로운 색의 세계를 경험하는 기회가 된다”고 말했다. 색은 제품 마케팅의 변수이기도 하지만 제품 가치를 올리고 브랜드를 강화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김민경 한국케엠케색채연구소장은 “컬러는 상품 가치를 극대화하고 사람의 감성을 움직여서 소비를 일으키는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수단”이라며 “색을 제대로 쓰면 디자인이 한층 파워풀해진다”고 말했다. 모든 PC가 불투명한 플라스틱 재질을 사용하던 90년대에 애플이 그래픽에 특화된 아이맥 PC를 내놓으면서 형형색색 투명 플라스틱을 본체에 사용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박현영 기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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