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기고]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14. 이교숙 선생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필자에게 음악 이론의 모든 걸 가르친 이교숙 선생의 젊은 시절 모습.

이교숙 선생님은 이후 해군 군악학교장.군악대장, 이화여대.연세대.서울대 교수 등을 지냈다. 태극기에 경례할 때 나오는 배경음악도 그의 작품이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하프를 들여온 분이기도 하다. 덩치 큰 남자가 섬세한 하프를 연주하는 게 겉보기엔 그리 어울리지 않았다. 당시 우리나라 오케스트라에는 하프가 없었다. 그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신념으로 하프를 스스로 공부하셨던 게다. 그만큼 한국의 음악 현실에 대한 생각이 깊은 분이었다.

미 8군의 직업 음악인을 대상으로 한 강의가 내 소속사인 '화양' 사무실에서 시작됐다. 선생님은 '도레미파솔라시도'부터 가르쳤다. 기초 중의 기초부터 완벽하게 통달시키려는 의도였다. 1년간 클래식 화성학을 배운 뒤 악기론에 들어갔다. 이 세상에 나와 있는 모든 악기의 성격과 음역.기능 등 세부적인 것 어느 하나 놓치지 않는 강의였다. 숙제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1주일에 세 번 있는 강의에 맞춰 숙제를 하려면 매일 밤을 새도 모자랐다. 자연히 공부는 지루하고 어려웠다. 1957년 공부를 시작한 1기 강습생 50명이 3년 뒤엔 네댓 명만 남았다. 다행히 나는 모든 걸 팽개치고 강의를 계속 들을 수 있었다.

달러 빚이란 것도 그때 처음 얻었다. 월급은 한 달을 기다려야 나오는데, 수업료를 마련할 길이 없어서였다. 당시 내가 소속된 회사에는 돈놀이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처럼 월급이 나오는 신용 있는 사람은 돈을 꾸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 돈을 쓰다가 비싼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하지만 젊은 나이인데, 까짓것 빚이 문제인가. 어떻게든 공부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입문한 지 6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화성학을 배우는데 작곡 숙제가 나왔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작곡을 했다. 선생님은 과제물을 거둬 점수를 매긴 뒤 다음 시간에 나눠주곤 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이름을 부르며 과제물을 돌려주시는데 내 것만 빠져 있었다.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칠판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내 곡이었다.

"다들 잘 봐라. 곡은 이렇게 써야 한다. 정말 좋은 감각이다. 자네는 작곡가로 나서면 좋겠다."

나이 많은 다른 선배들에게 미안하고 민망해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속으론 좋아서 하늘로 붕 떠오른 기분이었다. 며칠 동안 잠도 안 왔다. 나는 선생님의 칭찬에 용기를 얻어 작곡에 몰두하게 됐다. 나중에 학생이 몇 남지 않자 선생님은 내 얼굴만 쳐다보며 강의했다. 다행히 같이 수업을 듣던 다른 선배들이 크게 불평하지 않아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첫 작품을 잃어 버렸다. 정신없이 숙제를 많이 하다 보니 이래 저래 쌓인 오선지 틈에 뒤섞여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나보다. 그 곡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다소 파격적인 내 작곡 스타일이 그 첫 작품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렇게 좋은 선생님과 인연을 맺은 것이 내겐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그 시절에 클래식과 재즈를 아우르는 고급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건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가 없이 작곡가 신중현이 있을 수 있었을까.

신중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