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유리천장 뚫었다…‘여우 감독’ 박미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프로스포츠 유일 여자 사령탑…흥국생명 이끌고 배구 코트 돌풍

2017년 새해가 밝았다. 여자프로배구 박미희(54) 감독은 2년8개월째 흥국생명을 이끌고 있다. 국내 프로스포츠 여자 감독으로는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는 현재 국내 프로스포츠 전 종목을 통틀어 유일한 여자 감독이기도 하다.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흥국생명을 이끌고 있는 박미희 감독. 박 감독은 “여자라는 편견을 버리고 남자 감독과 동등한 리더로 봐 달라”고 했다. [용인=장진영 기자]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흥국생명을 이끌고 있는 박미희 감독. 박 감독은 “여자라는 편견을 버리고 남자 감독과 동등한 리더로 봐 달라”고 했다. [용인=장진영 기자]

지난달 28일 경기 용인 흥국생명 연수원에서 만난 박 감독은 “여자 선배 감독들이 대부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둬서 부담이 크다. 그래도 부담감 때문에 약해지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고 마음 먹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고 말했다. 앞서 여자배구 조혜정 감독(GS칼텍스·2010년 4월~2011년 4월), 여자농구 이옥자 감독(KDB생명·2012년 4월~2013년 2월)은 1년 만에 물러났다.

선수 때 센터·세터 다재다능 스타
은퇴 뒤 한동안 평범한 주부로 지내
부임 초엔 주위서 냉랭한 시선도
선수들과 영화 보고 치맥 파티
섬세함으로 팀 이끈 ‘언니 리더십’
하위권 맴돌던 팀 3년 새 1위로

박 감독은 한 시대를 풍미한 배구 스타였다. 올드팬들은 그가 1980년대 미도파 유니폼을 입고 날렵한 플레이를 펼치던 장면을 기억한다. 센터였지만 세터 포지션까지 소화할 정도로 다재다능해 ‘코트의 여우’로 불렸다. 평범한 가정주부의 삶을 산 그가 TV 해설위원을 거쳐 감독이 되자 주위의 시선은 냉랭했다. 박 감독은 “‘여자 감독이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우리 팀이 이기면 ‘여자 감독에게 져서 기분이 안 좋다’는 말도 나왔다”라고 털어놨다.

볼링장 회식 후 셀카를 찍은 박미희 감독·임해정·김재영·이재영·황현정(왼쪽부터). [사진 흥국생명]

볼링장 회식 후 셀카를 찍은 박미희 감독·임해정·김재영·이재영·황현정(왼쪽부터). [사진 흥국생명]

그러나 박 감독은 후배들과 함께 코트 위에서 묵묵히 구슬땀을 흘렸다. 하위권을 맴돌던 흥국생명은 2014~15 시즌 4위, 지난 시즌 3위로 상승한데 이어 올 시즌 1위(1일 현재 11승4패·승점32)를 달리고 있다. 흥국생명 선수 18명의 평균 나이는 23세. 의욕만 넘쳤던 젊은 선수들은 초보 지도자 박 감독과 함께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면서 한층 단단해졌다. 3시즌 만에 흥국생명은 공격과 수비 모두 안정적인 팀으로 변모했다. ‘쌍포’ 타비 러브(캐나다)는 득점 4위(375점), 이재영은 득점 7위(249점)로 활약하고 있다. 이재영은 리시브 1위(세트당 4.02)도 기록하고 있다. 세트 부문 1위(세트당 평균 12.82) 조송화는 국내 최고의 세터로 우뚝 섰다.

박 감독의 리더십의 요체는 언니 같은 섬세함과 따뜻함이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부드럽고 따뜻하게 여자 선수들을 다독이는 것이다. 박 감독은 “여자 선수들은 남자 선수들보다 예민하다. 훈련을 더 세게 하는 것보다 심리를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하다”며 “선수들을 세세하게 관찰해 공감대를 형성하려고 노력한다. 밥을 잘 먹지 않는 선수에겐 ‘요즘 우울한 일이 있니? 혹시 남자친구랑 싸웠니?’라고 묻고, 여드름이 나서 신경쓰는 선수에겐 ‘피부과 병원에 같이 가보자’고 얘기하는 식”이라고 말했다.

외국인 선수 러브는 “해외 리그를 많이 경험했지만 여자 감독은 처음이다. 감독님이 안아주면서 친근하게 대해줘서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고 했다. 회식 문화도 다르다. 최근엔 흥국생명 선수들이 볼링장에서 박 감독과 함께 귀여운 표정으로 찍은 셀카가 공개돼 화제가 됐다. 극장에서 함께 영화를 관람하거나 치맥(치킨+맥주) 파티를 하기도 한다. 박 감독은 “여자 감독이니까 스킨십을 할 수 있어서 좋다. 엉덩이를 팡팡 두들겨주고, 기분 좋을 때는 같이 얼싸안는다”고 말했다.

흥국생명 선수들은 박 감독을 ‘공주 같다’고 말한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여간해선 화를 내지 않는 모습이 공주를 닮았단다. 훈련도 선수에게 믿고 맡기는 스타일이다. 작전타임 때는 흥분하지 않고, 조용하게 핵심만 짚어준다. 박 감독은 “원래 화를 내지 않는 편이다. 애들을 키울 때도 정말 필요할 경우에만 화를 냈다. 그래야 ‘우리 엄마가 무서울 때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더라”며 “선수들을 가르치는 것도 똑같다. 내가 가끔 화를 내면 선수들이 무서워 한다”고 말했다.

박 감독은 또 “요즘 여자 지도자로서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다”고 털어놨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이 이어지면서 ‘여자 지도자는 안돼’라는 회의론이 사회 곳곳으로 퍼지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박 감독은 “현 상황이 무척 유감스럽다. 그렇다고 여자 지도자는 무조건 안된다는 건 비약”이라며 “지도자를 남녀로 나눠서 생각하지 말고 동등한 리더로 봐 달라. 난 그저 선수들의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역할에 충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용인=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
사진=장진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