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6㎞ 걸어 글라이더 회수, 하루 12번씩 반복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12호 18면

현재 전 세계는 3만 대 가까운 민간 항공기로 서로 연결된다. 보잉사 자료에 따르면 항공산업은 3000억 달러 규모의 거대시장을 형성한다. 항공은 복잡한 과학기술이 정교하게 결합된 분야다. 공기역학과 같은 물리학, 날개와 수직·수평 꼬리날개를 움직여 항공기를 조종하는 기계공학, 엔진을 가동하는 내연공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아이디어가 통합됐다.


항공 시대는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1903년 12월 17일 노스캐롤라이나주 키티호크의 모래언덕에서 ‘동력을 이용해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를 조종하는 비행’을 처음으로 하면서 시작됐다. 그런데 형인 윌버 라이트(1867~1912)와 동생인 오빌 라이트(1871~1948) 모두 고교를 중퇴했다. 눈썰미와 손재주가 좋았던 이들은 손수 제작한 인쇄기로 신문 출간과 인쇄업을 하다 자전거 열풍이 불자 1892년 오하이오주 데이튼에 자전거를 수리하고 판매하는 가게를 열었다. 과학기술 역사에서 유명한 ‘라이트 형제의 자전거 가게’다. 1896년부터는 자전거를 만들어 팔았다.


일정한 수입이 생기자 형제는 원래 관심사이던 항공기 개발에 몰두했다. 당시 서양 사회는 자전거 열풍에 이어 ‘하늘을 나는 꿈’에 빠져 있었다. 특히 독일의 오토 릴리엔탈(1848~1896)이 발명한 무동력 글라이더에 열광했다.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공기 흐름을 이용해 비행하는 릴리엔탈의 글라이더는 대중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이를 통해 과학기술이 인류의 삶을 향상시킬 것이라는 믿음이 전 세계를 지배했으며 라이트 형제도 그 중의 하나였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에 대한 꿈은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복음주의 개신교 교회인 그리스도형제연합교회의 성직자였던 아버지는 1878년 형제에게 종이와 대나무, 코르크로 만든 비행체 장난감을 사줬다. 고무줄을 감았다 놓으면 프로펠러가 한참 동안 돌아갔다. 라이트 형제는 이 장난감이 망가질 때까지 계속 가지고 놀았는데 나중에 어렸을 때 이때의 경험이 항공기에 대한 관심을 불렀다고 회고했다.

[도그마 빠지지 않고 릴리엔탈 넘어서]
라이트 형제는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존경하던 릴리엔탈을 과감하게 뛰어넘었다. 릴리엔탈은 글라이더를 탄 사람이 무게 중심을 이동해 비행 방향을 바꾸는 조종 방식을 고안했다. 하지만 라이트 형제는 관찰을 통해 새들은 날개 끝부분의 각도를 조절해 좌우로 방향을 바꾼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항공기 설계에 반영했다. 사실 라이트 형제의 ‘최초 비행’을 두고는 논란이 없지 않다. 하지만 공기 역학을 이용해 항공기를 원하는 방향으로 조종할 수 있는 혁신적인 조종기술을 발명한 것은 이들이 처음이다. 이를 통해 지금과 같은 고정익 항공기가 개발될 수 있었다. 라이트 형제는 첫 비행 뒤인 1904~1905년 세계 최초로 실용적인 고정익 항공기를 내놨다.


놀라운 사실은 현재도 거의 모든 고정익 항공기는 라이트 형제가 개발한 항공 조종의 개념과 기술을 바탕으로 비행한다는 점이다. 모든 항공기는 기본적으로 날개와 수직 꼬리 날개, 수평 꼬리 날개를 이용해 상승과 하강, 좌우 이동, 좌우 기울기 이동 등을 하는데 이러한 3축 조종술이 바로 라이트 형제에서 비롯했다. 이러한 3축 조종술은 항공기의 균형을 효과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해주며 이를 통해 조종사는 안전하고 효율적인 조종을 할 수 있다.


라이트 형제 이전에는 단지 띄우는 것이 문제였지만 이후에는 항공기를 원하는 방향으로 얼마나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하느냐로 기술 개발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 이전의 개발자들은 신뢰성을 높이고 비행거리를 늘리기 위해 강력한 엔진 개발에 치중했다. 하지만 엔진이 강할수록 무게도 함께 늘어나 안정적인 비행을 방해하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라이트 형제의 혁신적인 3축 조종술은 항공기 개념에 혁신을 가져왔다. 인류는 비로소 공기 속을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있게 됐다.


라이트 형제는 철저한 준비와 끈질긴 실험으로도 유명하다. 1899년 대형 연을 만들어 자신들이 관찰한 조류 비행술을 실제로 항공기에 적용할 수 있는지를 실험했다. 치밀한 관찰과 반복되는 실험은 이들의 원동력이었다. 여기에서 공기 속을 마음대로 비행할 수 있는 조종술의 기초 개념을 확립하고 다음 단계로 유인 글라이더 실험에 들어갔다. 비행 조종에서 바람의 중요성을 절감한 이들은 미국에서 가장 비행하기 좋은 장소를 찾아 나섰다. 라이트 형제는 치밀했다. 미국기상청에 요청해 기상자료를 받은 뒤 철저히 분석했다. 그 결과 바람이 부드럽고 모래사장도 넓은 노스캐롤라이나주 키티 호크를 시험장소로 선택했다.

[3년간 끊임없이 시험 비행 반복]
1900년 10월부터 3년간 라이트 형제는 키티 호크에서 글라이더 시험 비행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조종사가 타지 않고 글라이더에 줄을 달아 무인으로 시험하다 차츰 유인 비행으로 옮아갔다. 킬데빌스힐스라는 30m 높이의 바닷가 모래 언덕으로 올라가 글라이더를 날렸다. 한 번 날릴 때마다 6㎞를 걸어 글라이더를 날라야 했다. 시험 비행이 많은 날에는 하루 12번을 진행하기도 했다. 라이트 형제는 이를 3년간 끝없이 반복했다. 과학기술 혁신은 ‘인내심과의 전쟁’이었다. 고통스럽게 그 과정을 견디며 그 전쟁에서 이긴 사람만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항공기 개발을 위한 설계와 조종술 개발을 위한 마지막 관문이었다.


그해 12월 라이트 형제는 집에서 새로운 발명을 했다. 자전거 가게의 부품과 철판으로 풍동(風洞)을 제작했다. 풍동은 공기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관찰하고 힘을 계산할 수 있게 고안된 시설이다. 하늘을 나는 데 가장 적합한 날개 모양을 개발하고 실험하는 작업에 필수적이다. 이를 이용한 항공기 실험은 지금도 항공기 개발 작업과 관련 연구에서 기본이다. 라이트 형제의 또 다른 걸작 발명품인 풍동 덕분에 인류는 항공기 개발에 걸리는 비용과 시간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게 됐다. 이를 이용하면 양력은 물론 항공기가 공기라는 유체 속을 이동할 때 이 움직임에 저항하는 힘인 항력(抗力)도 파악할 수 있다.


라이트 형제는 풍동을 활용해 무려 200종류에 이르는 날개로 각종 실험을 진행해 양력과 항력을 파악했다. 실험은 정밀했다. 무려 38종류의 세부적인 실험으로 날기에 가장 적합한 날개 설계가 무엇인지를 파악했다. 과학자들은 이들의 풍동 실험이 ‘최단 시간에, 최저 비용으로, 최소 재료로 이룬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결정적인 항공기 개발 실험’이라고 평가한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길고 폭이 좁은 날개였다.


이들이 끈질기게 수집한 데이터는 항공기 개발의 기본이 됐다. 혁신과 집념이 동시에 작용하면서 얻을 수 있었던 결과였다. 이는 세계 최초의 비행보다 더 중요한 인류사의 혁신이다. 실제로 라이트 형제가 처음으로 얻은 특허인 미국 특허번호 821393번은 세계 최초의 항공기에 대한 것이 아니고 ‘하늘을 나는 기계를 조종할 수 있게 해주는 공기 역할 컨트롤 시스템의 발명’에 관한 것이었다. 이들은 풍동 실험을 통해 고등교육을 받은 과학자나 기술자도 접근하지 못한 공기역학의 신세계를 개척했다. 풍동 실험 장치는 항공기를 안전하게 조종하는 신뢰할 만한 방법을 찾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동시대 다른 항공기 개발자들과 다른 혁신적인 시각이자 활동이었다. 여기서 일궈낸 업적은 인류사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형제의 의지와 신념만으로 이룬 쾌거]
조종술 개발도 계속됐다. 라이트 형제는 1902년 9월에 700회, 10월에 1000회가 넘는 글라이더 시험 비행을 통해 선회 조종 실험을 했다. 26초간 189.7m까지 비행했다. 이를 통해 실제 비행시험 전에 조종법을 확보했다. 여기서 얻은 3축 조종법은 1902년 글라이더를 기반으로 하는 조종 특허를 얻었다. 이 조종법 특허를 항공기의 실제 발명으로 간주하는 학자도 적지 않다. 1903년 12월은 발명에 대한 실험일 뿐이라는 평가다.


1903년 라이트 형제는 목제 몸체와 프로펠러, 가솔린 엔진으로 날개 길이 12.3m에 무게 174㎏의 ‘라이트 플라이어 1호’를 제작했다. 12월 17일 키티호크에서 역사적인 첫 동력비행을 해낸 바로 그 항공기다. 제작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이를 위해 라이트 형제는 수많은 엔진 제작자들에게 ‘강하고 효율적이며 가벼운 엔진’을 주문하는 편지를 썼지만 요구 조건에 맞춰 제작해주겠다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그러다 가게에서 일하던 찰리 테일러에게 부탁해 6주 만에 12마력의 엔진을 만들었다. 프로펠러를 돌리는 체인은 자전거 체인을 사용했다.


플라이어 1호기는 세계 최초의 동력 비행의 주인공이지만 시험 비행은 역경의 연속이었다. 엔진 구동을 시험하다 프로펠러 축이 부러져 시험 비행이 몇 주간 연기됐다. 동전던지기에서 조종 첫 순위로 정해진 윌버가 12월 3일 시험 비행을 시도했지만 이륙에 실패해 기체에 손상이 생겼다. 수리와 재점검을 거친 뒤 이번에는 오빌의 조종으로 이륙해 첫 비행에 성공했다. 시속 43㎞의 강한 맞바람을 맞으며 12초 동안 시속 10.9㎞의 속도로 37m를 비행했다. 윌버가 53m, 다시 오빌이 61m를 각각 비행했다. 정오쯤에 윌버가 네 번째 비행에 들어가 59초 동안 259m를 날았다. 정부의 지원도, 기업의 투자도 없이 오로지 라이트 형제의 의지와 신념으로 이룬 쾌거였다.


최종 착륙한 플라이어 1호기는 강한 바람에 여러 차례 뒤집히면서 못쓰게 됐다. 이 항공기는 1948년 수도 워싱턴의 스미소니언박물관에 1달러를 받고 기증돼 영구 전시되고 있다. 인류 항공 역사는 이처럼 시작은 미약했지만 나중에는 창성했다. 라이트 형제는 도전하는 자만이 혁신할 수 있고, 혁신하는 자만이 역사를 만들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라이트 형제의 혁신으로 인류는 이전까지 볼거리 수준이던 항공기를 빠르고 효율적인 이동의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윌버는 1912년 보스턴으로 출장을 다녀온 뒤 장티푸스로 숨졌다. 오빌은 1948년까지 살며 항공기가 전쟁의 주역을 맡았던 제2차 세계대전과 제트기 시대까지 지켜봤다. 평생 혁신의 가치를 추구한 형제의 굵은 삶이었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Copyright by JoongAng Ilbo Co., Ltd. All Rights Reserved. RSS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