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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내 가슴 적신 갈피갈피…그 속에서 읽은 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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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2016년 나를 뒤흔든 책

2017년 새해를 여는 ‘책 속으로’ 지면입니다.

자신의 영역에서 독창적인 통찰과 남다른 안목을 가진 여덟 분께 ‘책 한 권’을 부탁했습니다. 2016년 출간된 책 중에서 나의 눈과 가슴을 흔들었던 ‘딱 한 권’입니다.

이들이 고른 책이 출판 시장에서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됐거나 대단한 화제를 일으킨 책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대신 이들 책에는 기다란 줄이 달린 두레박이 있습니다. 그 줄을 타고 내려간 ‘울림’이 여러분의 가슴을 흔들어주길 기대합니다.

그런 ‘울림’을 통해 아무리 짙은 어둠이 끼어도 새해에는 우리 앞에 길이 열리길 바랍니다.

한·중·일 역사의 우물 ‘삼국지’
세 나라가 길어올린 점은 달랐다

중국을 만들고
일본을 사로잡고
조선을 뒤흔든 책이야기

이은봉 지음, 천년의상상
336쪽, 1만8000원

나는 ‘삼국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싫어한 것은 이 책과 우리 시대 사이에 놓인 거리를 무시하고 이 책에서 자꾸 이상한 교훈을 끄집어내는 시대착오였다. ‘삼국지’를 봉건적으로 독해하는 이들에 대한 짜증이 아마도 책 자체에 대한 편견으로 옮겨진 모양이다. 하지만 ‘삼국지 박사’ 이은봉의 이 『삼국지문화사』는 나의 삼국지에 대한 오랜 편견을 사정없이 깨주었다.

삼국지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70%의 역사에 30%의 허구가 섞인 이 책이 동양의 ‘고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게다. ‘고전’이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달리 읽히면서 그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텍스트를 가리킨다. 이를 해석학에서는 ‘영향사’(Wirkungsgeschichte)라 부른다. 이 책에서 삼국지의 영향사는 크게 시·공간의 두 축으로 전개된다. 먼저 ‘공간적’으로 이 책은 삼국지라는 하나의 텍스트가 중국·한국·일본에서 각각 어떻게 수용되었는지 추적한다. 가령 중국에서 이 책은 왕조의 정통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한국에서는 청나라에 당한 굴욕감의 심리적 보상으로, 일본에서는 주인의 은혜에 대한 ‘의무’와 ‘의리’를 강조하는 사무라이 미학의 교본으로 사용되었다. 이어서 ‘시간적’으로는 삼국지라는 텍스트가 한 사회 내에서 수용되는 방식이 변화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사무라이 미학의 교본이었던 삼국지가 상인계급인 조닌이 대두하던 시절에는 미덕이나 교훈 없는 순수 오락적 텍스트로 활용되다가, 군국주의 시절에 이르면 대륙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념적 선전수단으로 악용된다. 한편, 이 시기 조선에서는 삼국지가 신문의 연재소설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텍스트로 변모한다.

이 책의 압권은 ‘역사’에 속했던 삼국지가 ‘소설’ 삼국지로 거듭나는 과정을 추적한 부분이다. 저자는 가라타니 고진을 이용해 이를 서구의 원근법이 문학에 침투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칭찬에 인색한 나도 이 책은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랜만에 책 같은 책 읽었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

핑커·리들리 vs 보통·글래드웰
시대의 지성들이 벌인 미래 논쟁

사피엔스의 미래
알랭 드 보통 외 지음
전병근 옮김, 모던아카이브
208쪽, 1만3500원

“아주 귀에 거슬리네요” “편협하기 짝이 없군요” 만일 어떤 토론회 장에서 이런 날선 말들이 난무했다면, 정치 논쟁의 자리였을 것이라 짐작할 것이다. 아니다! 그러면 이 날선 공방을 벌인 선수들은 원래 입이 좀 건 논객들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다. 2015년, 3000명의 청중이 모인 캐나다의 한 모임(‘멍크 디베이트’)에서 ‘인류의 미래는 더 나아질 것인가’라는 주제로 공개토론이 열렸고, 그때 튀어나온 말과 말이다.

선수들은 누구였을까. 상대방의 말이 귀에 거슬린다고 했던 이는 철학자이며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저자인 알랭 드 보통이고, 그를 불편하게 했던 이는 『본성과 양육』의 저자인 세계적 과학 저널리스트 매트 리들리였다. 상대방을 편협하다고 비난한 이는 『아웃라이어』의 저자인 경영저술가 말콤 글래드웰이며, 공격당한 이는 하버드 대학교의 심리학자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의 저자인 스티븐 핑커였다. 주최측은 이 시대의 과학 정신을 대표하는 핑커와 리들리를 한 진영으로 놓고, 다른 진영에는 인문 정신을 대표하는 보통과 글래드웰을 배치함으로써 이 세기의 대결을 기획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지만, 이 치열한 논쟁의 기록을 읽는 독자들은 단숨에 빠져든다. 핑커와 리들리의 무기는 사실과 숫자다. 그들은 수명, 건강, 부, 평화, 안전, 자유, 지식, 인권, 성 평등, 지능 측면에서 인류가 얼마나 나아지고 있는지를 역설했다. 반면 글래드웰과 보통의 한결같은 전략은 ‘순진한 과학자 양반들, 그게 그리 단순하지가 않아요’다. 그들은 행복, 기후 및 핵 문제 등을 거론하며, 미래의 문제는 과거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복잡하고 위험천만하다고 반론한다.

어떤 팀이 승자일까. 양측 모두가 설득력이 있지만, 독자에 따라서 승자는 달라질 수 있다. 양측 모두가 예리한 칼날을 서로에게 들이댔지만, 그 격돌은 치열한 논쟁을 통해 우리 사회가 또 한 번 진보한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감동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진짜 논쟁이 필요한 지금, 이 책을 다시 꺼내보면 어떨까.

장대익 서울대 교수

도처에 있지만 그러나 낯선
죽음을 기리는 49재 연작시

죽음의 자서전
김혜순 지음, 문학실험실
160쪽, 8000원

김혜순 시인의 『죽음의 자서전』은 49편의 연작으로 이루어진 연작 시집이다. 제목이 일러주고 있듯이 죽음이 화자가 되어 그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시집에 실린 49편의 시에는 하루부터 마흔아흐레까지의 부제가 붙어 있으니, 이것은 죽음의 자서전인 동시에, 책이라는 물성을 뒤집어 쓴 49재로서 수많은 죽음을 기리는 한 권의 제사(祭祀)가 될 터이다.

이 시집이 수행하는 특별한 제의는 올 한해 나온 시집 가운데 내게 가장 깊은 감동을 주었다.

시인은 출근길 지하철에서 갑자기 쓰러지며 죽음을 경험하는 순간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 삶에 가득한 여러 죽음의 결을 그려낸다.

그 많은 죽음의 이미지들은 죽음이 가장 빠지기 쉬운 비극적 감상성에 빠지는 대신, 우리 삶의 도처에 널려 있는 그 죽음들이 얼마나 만연한지, 그럼에도 얼마나 낯선 것인지 절감케 한다. 지난 수년 간 우리를 무겁게 짓누른 죽음들에 대해, 시인은 섣부른 위로나 손쉬운 삶의 긍정을 전하지 않는 것이다.

나를 진정 감동케 한 것은 바로 이 대목이었다. 지난 수년 간 한국문학의 중요한 고민 가운데 하나는 세월호를 비롯하여 우리의 삶에 짙은 그림자를 뻗어온 죽음들을 문학이 어떻게 마주하고 그려내는가 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40년에 가깝게 시작(詩作)을 이어온 대가는 그에 대한 가장 진취적이면서 용감한 답변을 내놓은 것이다.

“네가 답장할 수 없는 곳에서 편지가 오리라// 네가 이미 거기 있다고/ 네가 이미 떠났다고”(‘백야-닷새’) 시집 속의 죽음은 언젠가 죽을 우리에게 이렇게 전한다. 너는 이미 죽음 속에 있으며, 죽음으로 떠났고, 너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고. 이 담담한 전언이 우리의 불안을 기묘하게 가라앉힌다.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하여 오히려 스스로 죽음이 되어 말하는 이 연극적 제의를 통해 우리는 계속 살아나갈 용기를 얻을 수 있다.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안타까운 죽음을 끝까지 기억하고 기리는 방식으로.

황인찬 시인

우리 사회의 좌절된 꿈과 잔해
그 폐허에서 증언한 한가닥 희망

사회학적 파상력
김홍중 지음, 문학동네
576쪽, 2만2000원

‘구원’이라는 말은 어떻게 해도 세속의 차원을 넘어간다. 감당하기 힘들고 계면쩍다. 그러다 가끔은 또 생각해본다. 나의 세속은 오로지 현재의 덧없는 물질적 시간에 제약되어 있기만 한 것일까. 이런 생각을 여투게 하면서 지나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의 시간을, 그 시간 속의 사람들을 나의 왜소한 존재와 이어보게 만든 데에는 발터 벤야민의 사유와 글이 큰 자극이 되었지 싶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인 셈이다.”(『역사철학테제』)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이 ‘희미한 메시아적 힘’을 한국어의 문장과 생각 안에서, 한국인의 현실 안에서, 그리고 나의 실존적 경험 안에서 좀더 명징하게 이해하게 해준 이는 사회학자 김홍중이다. 그는 개인 각자의 내적 지평에서 발생하는 ‘마음’(꿈, 감정, 욕망의 복합체로서)을 그 심적 차원을 조형하는 사회적 지평 안에서 상호 구조화하는 ‘마음의 사회학’으로 구상하고 실천해왔다. 문화와 예술을 깊고 넓게 아우르는 그의 사회학적 비평의 뛰어남에 대해서야 굳이 별도의 첨언이 필요 없을 줄 안다.

최근에 나온 『사회학적 파상력』에서 그는 벤야민, 아비 바르부르크, 디디-위베르만 등을 경유해 얻어낸 ‘파상력(破像力)’과 ‘잔존(殘存, Nachleben)’ 개념을 통해 지금 우리 사회의 좌절된 꿈, 부서진 마음의 잔해를 수집하고 구성한다. 그리고 거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고 생성을 멈추지 않는 희망의 씨앗을 찾는다. 그의 파상력은 목적론적 상상력의 한계지점에서, 그 상(像)의 파괴된 잔해 속에서 겨우 활동하는 만큼 계몽도 도덕도 예언도 모른다. 대신 그의 ‘마음의 사회학’은, 그리고 ‘사회학적 파상력’은 몰락하고 부서지는 것들의 자리에 머물며 잠시 반짝이다 저편으로 사라지는 반딧불이의 미광을 증언하고자 한다.

그것은 그의 말대로 희망의 희망이며, 희망이 스스로를 구성하고 지켜온 잔존의 능력에 대한 증언이다.

그의 글을 읽고 느끼는 동안은 나도 얼마간 반딧불의 자리와 시간으로 간다. 이것은 귀하고 드문 체험이다.

정홍수 평론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불행
혼자가 된 이들의 조난 신호

베개를 베다
윤성희 지음, 문학동
276쪽, 1만2000원

윤성희 작가의 등단작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복사기에 자기 얼굴을 밀어넣고 그 불빛의 온기로 하루를 견디는 여자애의 고독에 매료되어 나는 소설이라는 것이 어떤 신호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소설이라는 것은 이렇게 저 멀리에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이 보내는 반짝반짝 빛나는 신호이구나, 하는. 윤성희의 다섯번째 소설집 『베개를 베다』도 ‘조난’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는 스펙터클한 조난의 서사가 아니라, 오래되고 일상화되어 이제 이 도시를 형성하는 구조의 원형이 되어버린 ‘조난’으로서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것은 불시에 닥치는 불행의 이야기로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가족을 잃기도 하고 서로에게 모욕과 냉담함을 드러내기도 하며 바보 같은 이유로 먼저 이별을 선언하기도 하는, 그렇게 해서 혼자가 되고 마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게 혼자가 된 우리는 이 도시를 떠돌면서 우스꽝스러운 엑스트라가 되어 ‘큰일났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내내 연습하고 이름도 헷갈리는 조카의 운동회에 우연히 참가해 손에 땀을 쥐고 계주 경기를 관람한다. 아니면 회사에 거짓말을 하고 ‘이틀’ 쯤 다 더럽혀진 옷을 입고 한쪽이 깨진 안경으로 목련나무들을 짚어가며 배회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개인이 도저히 맥락화할 수 없는 도시의 체계, 그것이 만들어낸 슬픔과 허무의 공간에서 언제 걸음을 멈출 수 있을까, 궁금해하면서. 그렇게 해서 소설 ‘이틀’에 등장하는 할머니처럼 이 아스팔트 위에서 한번 편안히 누워보고 싶다고 중얼거리면서. 읽다보면 책을 두 손으로 잡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지금 이 각도가 작품을 써내려간 작가의 마음의 각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음으로 된 밋밋한 휘파람을 불며 더이상은 울지마, 하고 에둘러 달래는 마음의 각도. 눈물을 흘리는 엄마 옆에서 별안간 김수한무거북이와두루미…, 하면서 코미디언 흉내를 내는 아이의 천진한 위로의 각도. 그 각도에 대해 생각하는 건 2016년이 세계의 기울어짐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해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마 이 책의 다정한 각도가 아니었다면 쉽게 건널 수 없는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김금희 소설가

이미 우리 곁에 온 AI 혁명
몽땅 바뀌게 될 정치·경제

제4차 산업혁명
클라우스 슈밥 지음
송경진 옮김, 새로운현재
288쪽, 1만5000원

‘제4차 산업혁명’은 2016년 1월 세계경제포럼인 다보스포럼에서 본격적으로 제시된 말이다. 이 개념에는 현재 진행 중인 기술 혁명이 인류의 삶과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세계경제포럼의 창설자이자 회장인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은 이러한 제4차 산업혁명의 도래를 분석한 저작이다.

슈밥은 디지털 혁명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산업혁명을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른다. 제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기술은 물리학·디지털·생물학 기술이다. 무인운송수단, 3D 프린팅, 첨단 로봇공학, 신소재가 물리학 기술을 주도한다면, 사물인터넷은 디지털 기술을, 유전학은 생물학 기술을 대표한다. 주목할 것은 각 분야의 기술 혁신이 초기 단계이지만 융합을 기반으로 서로의 발전을 증폭시키는 변곡점에 이미 도달해 있다는 점이다.

제4차 산업혁명의 충격과 영향은 경제, 기업, 국가-세계, 사회, 개인을 망라한다. 이 가운데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경제에 대한 분석이다. 슈밥에 따르면, 기업이 파괴적 혁신을 주도하면서 제4차 산업혁명은 성장을 고취시킬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기술이 노동을 대체하면서 일자리를 감소시키고 불평등을 강화시킬 수 있다.

제4차 산업혁명에 올바로 대응하기 위해 슈밥은 변화에 대한 포용적 접근과 공동의 담론을 역설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경제·사회·정치 시스템의 개혁을 주장한다. 이미 시작된 제4차 산업혁명의 성패는 결국 기술 변화에 대처하는 인류의 집합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제4차 산업혁명이 먼 미래가 아니다. 인공지능의 발전이 가져오는 노동의 위기, 빅데이터 활용 기업의 등장과 클라우드 등 새로운 플랫폼의 부상, 나아가 무인자동차·자동번역기·가상개인비서의 출현 등은 이미 실현된 현실이거나 곧 실현될 미래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공상과학(SF) 소설가 윌리엄 깁슨의 말이다. 『제4차 산업혁명』은 우리 곁에 다가온 미래를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

상대에 정성을 다하는 행위
어쩌면 삶 자체가 유혹 아닐까

유혹의 학교
이서희 지음
한겨레출판사
348쪽, 1만3000원

미모의 작가가 쓴 에세이집. ‘유혹의 학교’라는 어쩌면 은밀한 느낌을 주는 제목. 흐릿한 실루엣의 여인을 배경으로 한 표지. 혹자는 일견 이 책을 매력 있는 한 여성이 자신의 연애담을 털어놓으며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낸 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심지어 이 책을 다 읽고서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을 그런 방식으로 소비해서는 곤란하다. 이 책이 진짜 다루는 것은 ‘여성’의 ‘유혹’보다는, ‘사람’이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고 때로는 사랑하게 되는 일을 유혹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네 인간들은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숫자만큼의 관계가 발생한다. 우리는 그중 대개 우여곡절 끝에, 때로는 어처구니 없이 쉽게,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그 관계 속에 있던 사람 대부분을 스쳐 지나갔지만 실은 그 사람을 평생 사랑하게 될 수도, 아니면 평생 미워하게 될 수도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지났던 그 관계들을 돌이켜보면, 실은 그 과정이 얼마나 미묘했고 때로는 복잡했는가. 세상에 단 하나도 같은 관계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 낯선 조우에서 자신을 어떻게 내보이려고 했는가. 생각해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상대를 특별하게 여기고, 또 유혹하려는 자세를 취해왔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세상은 통째로 ‘유혹의 학교’라 불리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 책의 근간은 작가 자신의 경험담이나 주변의 이야기지만,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 관계담이 얼마나 특별하고 깊은 사유로 다시 재생되는가에 있다. 여기서 유혹을 정의하는 작가의 문장을 하나 인용한다. “존재와 존재의 만남은 ‘떨림’인데, 우리는 자주 그 떨림을 잊거나 인지조차 못한다. (중략) 유혹은 그 떨림을 인지하고 때로는 증폭하고 의미 있게 만들려는, 정성을 다하는 행위이다.

나와 상대, 그리고 우리가 함께 공존하는 현재를 위해서.(본문 205~206p)” 이 책을 덮고 나면, 우리는 우리가 지나왔던 아슬아슬한 관계에 대해서 두 눈을 감고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남궁인 응급의학전문의

쌈 싸 먹는 방법까지 있군요
실학자가 풀어낸 조선 생활사

조선 최고의
문장 이덕무를 읽다

한정주 지음, 다산북스
548쪽, 2만5000원

저자 한정주는 이미 여러 권의 개성 있는 역사 저술서를 펴낸 바 있다. 조선 선비의 호와 천자문·정약용 등 이르지 않는 데가 드물다. 말하자면 그는 역사 해설서의 촘촘한 ‘길내기’ 같은 일을 소임하고 있는 것 같다. 대로 뒤에 버려진 들판에 내는 길 말이다. 그의 이번 관심은 이덕무(1741~1793)다. 청장관 이덕무는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다른 실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구대상이 되는 경우가 적었던 듯하다.

스스로 ‘간서치’라고 할 정도로 책만 보는 바보(이 제목의 청소년용 책도 출간되어 있다)의 이미지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또 정약용이나 박지원같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거나 천재적 문장가라는 호칭을 얻지 못했던 것도 그 이유일 수 있겠다.

하지만 저자는 스스로 밝혔듯이 오래 전부터 이덕무에 ‘꽂혀서’ 그야말로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이덕무의 전집 『청장관전서』를 읽고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고 길을 낸 결과가 바로 이 책 『조선 최고의 문장 이덕무를 읽다』다. 책은 18세기 당시 움터서 꽃피우기 시작한 ‘조선다움’에 대한 이덕무의 시각을 좇아간다.

나는 직업적 호기심으로 ‘5장 조선의 풍속과 문화의 재발견’을 흥미롭게 읽었다. 우리 민족의 생활사는 역사적 연구 분야에서 그간 외면받아온 필드였다. 조선의 유교적 인물들은 제사에 관한 일을 제외하면 아마도 입에 넣고 몸에 걸치는 걸 묘사하고 쓰는 일을 사사롭거나 비루한 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이덕무의 집요한 생활사의 기록들은 놀랍다.

이를테면 이런 부분이다. “보라매, 송골매, 해동청…육덕위, 난춘, 조골, 방달이…발남작, 작응, 마분약”. 무려 조선의 맹금류를 이르는 15가지 이름을 쓰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각 이름의 사연과 연유까지 적고 있을 정도다. 읽다가 깜짝 놀란 부분도 있다. 『청장관전서』 가운데 ‘사소절’은 생활예절에 대한 글 모음인데 심지어 쌈을 싸서 먹는 방법에 대한 세세한 기술(記述)과 기술(技術)이 등장한다. 쌈 한 술에도 기술이 있었으니.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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