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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디자이너들, 소재를 갖고 노는 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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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9호 16면

신생 벤처기업을 뜻하는 ‘스타트업(start up)’은 정보기술(IT) 분야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패션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창의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시장을 개척해 나간다는 의미에서, 신진 패션 디자이너들은 그 자체로 스타트업이라 이름붙일 만하다. 이런 맥락에서 잠재력 있는 벤처기업을 인큐베이팅하듯 성장 가능성이 큰 신진 디자이너를 지원하는 것은 의미가 크다.


이를테면 세계 최대 패션 시장인 뉴욕에서 패션쇼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조윤선)와 한국콘텐츠진흥원(원장 송성각)이 뉴욕에서 개최하고 있는 ‘컨셉코리아’는 실력있는 한국 디자이너들이 세계 시장에 작품을 선보일 수 있도록 패션쇼를 열어주고, 해외 전문가의 멘토링과 비즈니스 네트워크 구축까지 포괄하는 지원 사업이다.


14번째를 맞이한 이번 시즌 컨셉코리아에는 ‘요하닉스’의 김태근, ‘키미제이’의 김희진, ‘그리디어스’의 박윤희 디자이너가 참여했다.


이들은 각각 독창적인 감성의 2017년 봄ㆍ여름(SS) 컬렉션으로 K-패션의 미래를 조금 더 밝게 물들였다.

김태근 디자이너의 ‘요하닉스’ 컬렉션

뉴욕 맨해튼 서쪽 부둣가에 있는 ‘피어 59 스튜디오’는 패션계의 중요한 행사가 자주 열리는 행사장이다. 매년 2월과 9월 개최되는 뉴욕패션위크 기간에는 유명 디자이너의 패션쇼와 패션 브랜드들이 주최하는 파티와 발표회가 열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뉴욕패션위크 첫날인 지난달 8일 한국 디자이너 세 명이 이 무대의 주인공이 됐다.


오전 10시. 패션쇼를 하기에는 다소 이른 시간임에도 550여 개 객석은 가득 찼다. 보그·엘르·하퍼스바자·WWD(Women’s Wear Daily)·뉴욕타임스 T 매거진 등 영향력 있는 패션 매체 기자들을 비롯해 명망있는 패션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쇼는 웅장한 현악기 연주로 시작됐다. 싱어송 라이터 앨리샤 키스, 스티비 원더 같은 세계적인 아티스트와 작업한 경력이 있는 ‘뉴욕 오케스트라 엔터테인먼트’ 단원들이 라이브로 연주했다.


3인 3색 패션쇼로 물든 뉴욕의 가을 런웨이는으로 시작됐다. 쇼의 문을 열고 워킹에 나선 모델 정소현은 흰색 셔츠 위에 빨간색 캔 스프레이로 웃는 입모양을 커다랗게 그려 넣어 눈길을 끌었다. 지난 시즌에 이어 두 번째로 컨셉코리아에 참여한 디자이너의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김태근은 영화 ‘도니 브래스코’ ‘킬빌’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 ‘미녀 삼총사’ 등 스파이의 이중적인 삶을 그린 영화에서 영감을 얻은 의상 22벌을 선보였다. 프린트와 감촉, 재질이 다른 소재를 섞어 ‘이중성’을 표현했다.


2~3개의 치마를 이어붙인 듯 소재를 다양하게 섞었다. 앞뒤 치맛단 길이를 자유롭게 변주한 데님 스커트는 보는 재미를 줬다. 길게 슬릿을 넣어 갈기갈기 찢긴 듯 표현한 데님 팬츠와 스커트는 여성미가 돋보였다. 요하닉스가 잘하는 ‘스트리트 쿠튀르’ 컨셉트를 잘 보여줬다는 평이 나왔다. 고급 맞춤복(오트 쿠튀르)을 만드는 기법으로 스트리트 감성을 풀어냈다는 의미다.

김희진 디자이너의 ‘키미제이’ 컬렉션

두 번째로 무대에 등장한 김희진의 ‘키미제이’는 트랙 수트와 파자마, 나이트 가운 같은 편안한 스타일에 복고풍 디테일을 가미했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카르마는 스스로 풀어야 하는 우주의 법칙’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들고 나왔지만 부드러운 색조와 편안한 스타일 덕분에 그다지 무겁지 않게 느껴졌다. 연보라·핑크·연두·하늘색 같이 소프트한 컬러 팔레트를 사용해 전체적으로 밝고 화사한 느낌을 줬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박윤희 디자이너의 ‘그리디어스’는 브랜드 이름에 걸맞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매력을 담아냈다. 그리디어스(greedilous)는 욕심 많다(greedy)와 환상적(fabulous)이라는 단어를 결합한 브랜드명. 아름답고 싶은 여성의 욕망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겠다는 야심이 담겨있다.


그리디어스는 1980년대의 자유분방함, 반항 정신과 스포티즘을 재해석한 디자인으로 패셔너블한 여성을 표현했다. 박윤희 디자이너는 직접 그린 프린트로 원단을 제작하는데, 강렬한 프린트가 이번에도 제 몫을 톡톡히 했다. 이번 그림의 주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놀이동산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모험과 추억을 담았다. 강렬한 프린트가 네오프랜 소재를 만나 섹시하면서 스포티한 느낌을 살려냈다. 특유의 러플이 들어간 드레스들은 섹시함과 귀여움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성공적으로 잡아냈다.


그리디어스, 3억원 넘는 의류 판매 계약 14번째 시즌, 7년이라는 시간이 쌓은 내공 덕분일까. 컨셉코리아 패션쇼에 대한 현지 반응은 뜨거웠다. 수년째 컨셉코리아 쇼를 관람한 패션계의 구루 패트리샤 필드는 “K-패션 디자이너들의 독특한 감각이 날로 발전하고 있다”면서 “한국과 뉴욕에서 뿐만 아니라 글로벌 디자이너로 발전할 가능성을 봤다”고 말했다. 필드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의상 감독을 역임한 패션 전문가다. 또 사이먼 콜린스 전 파슨스디자인스쿨 학장은 “디자이너들이 소재를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면서 “특히 그리디어스의 빨간색 보머 레더 재킷의 강렬함이 인상적이었다”고 덧붙였다.

박윤희 디자이너의 ‘그리디어스’ 컬렉션

뉴욕 패션계는 한국이 트렌디한 패션문화를 가진 나라라는 점을 조금씩 인식하기 시작한 듯 했다. NBC방송은 “세 디자이너는 대중이 접근하기 쉬운 컬렉션을 선보여 한국 패션의 진보적인 성향을 확실히 드러냈다”고 전했다. 경제매거진 포브스의 캐런 후아 에디터는 “컨셉코리아에 참가한 디자이너들의 컬렉션은 매우 개성 있으면서 트렌디해서 보는 내내 즐거웠다”고 말했다. 디지털 패션 플랫폼인 ‘듀옴므’의 카를로스 바소라 에디터는 “컨셉코리아는 시즌마다 꼭 봐야 하는 쇼 중에 하나다. 특히 이번 시즌에는 그리디어스의 강렬한 컬렉션이 가장 멋졌다”고 소감을 들려주었다.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은 패션쇼를 본 바이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쇼가 끝난 뒤 그리디어스는 약 32만 달러(약 3억5400만원) 가량의 의류 판매 계약을 맺었다. 미국은 물론, 두바이와 멕시코, 중국 바이어들까지 접촉해왔다고 한다. 키미제이는 약 38만 2,550달러 (약 4억 2,700만원)어치를 수주했다. 요하닉스는 뉴욕 다음으로 유럽으로 이동해 수주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


뉴욕 글 박현영 기자 hypark@joongang.co.kr, 사진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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