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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많은 인생이다… 이제 모두 흘러간 물기 어린 삶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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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호 8 면

김진주(金眞珠)씨는 1955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숙명여중·고,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했다. 노동운동 과정에서 만난 시인 박노해와 결혼, 사노맹 사건으로 구속돼 5년간 감방에서 청춘을 보냈다. 전기기술자 아버지 김해수는 국산라디오 1호(금성 A-501) 개발 주역이다. 이 과정에 5·16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고 한다. 암투병 중이던 아버지(2005년 작고)의 구술을 받아 국산 라디오 1호를 만든 엔지니어 이야기 『아버지의 라듸오』를 펴냈다. 곁에서 지켜본 그녀는 진주같이 결이 몹시도 고운 초로의 할머니였다.

한 여자가 있다. 유복한 집에서 곱게 자라 장래가 보장되는 대학과 전공(이화여대 약대)을 마친 재원이다. 대학 병원 약사로 일하던 그녀가 문득 찾아간 곳은 운동권의 아지트였다. 거기서 야간상고를 나온 두 살 아래 노동자 청년 박노해를 만난다. 결혼을 하고 구로공단 봉제공장 시다로 일하며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의 핵심으로 활약하다 공안당국에 잡혀 꽃다운 청춘 5년을 감옥에서 보낸다.


드라마 같은 그녀의 삶 속에 엔지니어 아버지는 조연쯤 된다. 5·16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소장의 파격적인 배려로 최초로 국산 라디오를 개발하고 대박을 터뜨린다.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의 충돌과 화합이라는 간단한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런 그녀가 『아버지의 라듸오』란 책을 냈다. 어버이날을 맞아 만났다. 예순을 넘었지만 곱고 단아한 미소가 인상적이다. 그녀의 이름은 김진주(61)다.


-어버이날이다. “따뜻한 밥 한 끼 해드렸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아버지는 살아생전 입버릇처럼 딸 키우는 재미로 인생을 살았다고 했다. 입이 까다로우셨다. 난 요리는 잘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유독 내가 지은 밥을 좋아하셨다. 감옥을 들락날락하며 거칠게 사느라 평생 맘고생만 시켜드렸다. 아버지께 밥상 한번 차려 드렸으면 소원이 없겠다.”


-밥이 중요한가. “중요하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소중한 의미가 있다. 유대감의 시작이고. 건강한 삶, 사회, 사상의 시작도 밥에서 비롯된다. 착한 사람들과 소박한 밥상을 함께하는 세상이 내 꿈이다.”


-사노맹의 핵심 멤버라 긴장했는데 참 곱고 따스하다. 우리가 아는 투사 김진주, 살기 어린 목소리로 법정에 들어서며 앙칼지게 ‘사노맹 만세’를 외치던 그 독기 서린 김진주가 맞나. “그 김진주가 맞다. 그런 소리 많이 듣는다. 내가 공안당국에 잡혀 영등포 구치소로 간다는 소문에 구치소 직원들이 ‘독한 년 온다’며 엄청 긴장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막상 감옥생활 하는 나를 보고는 놀랐다고 하더라. 20대에는 많이 순진했고 세상을 너무 몰랐다.”


-박노해의 아내 김진주로 더 유명하다. 어떻게 만났나. 운명인가, 팔자인가. “1978년 대학을 졸업하고 백병원 약사로 일했다. 유신 말기다. 그냥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스스로 운동권 소굴로 찾아갔다. 근사하게 표현하자면 시대정신(Zeitgeist)의 발로쯤 된다. 그 당시 강원용 목사가 있던 경동교회에 ‘젊은 둘째’란 이름의 청년부가 유명했다. 가혹했던 시절, 그때 운동권은 대개 교회의 보호막 아래서 활동했다. 새문안·향린·제일·경동교회가 그 중심에 있었고. 처음에는 단순히 고생하는 운동권 사람들을 도와 드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난 운동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거기서 매일 학습을 했다. 그러던 중 누가 박노해를 소개해줬다. 지금도 생각난다. 명동에 있던 ‘가스등’이란 카페다. 잉그리드 버그먼이 나왔던 흑백영화 제목을 따온 아주 작은 카페였다. 운동에 자신이 없던 중 스승을 만난 격이었다. 나이로는 연하이지만 남편을 평생 운동권의 스승으로 모시고 살았다. 난 기본적으로 ‘나이브’한 사람이다. 현실적인 고려를 잘하지 않는 타입이다. 로맨티스트 운동권쯤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래서 구로공단으로 갔나. “구로공단 등 노동현장으로 달려갔다. 봉제공장, 가죽공장에서 미싱 시다로 일했다. 본드 작업이 힘들었다. 숨쉬기도 고통스러웠고 손마디가 부르트고 쩍쩍 갈라졌다. 81년부터 86년까지 5년간 일했다. 처음 3년간은 하루 열두 시간 일해 6만원을 받았다. 같은 해 백병원 근무 약사로 일할 때 하루 8시간 일하고 30만원 받았다. 같이 노동운동을 했던 심상정 의원은 그때 이미 리더급으로 같은 공단 내 대우어패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나는 운동권 내 워낙 위치가 낮아 먼발치에서만 보기만 했고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노동은 너무 힘들었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고,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컴컴한 공장에서 소금땀 비지땀 흘리며 밤새워 미싱을 돌려야 했다. 그리고 늘 가난했다. 실컷 잠자고 배불리 밥 한번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밥상 나눔운동을 해 왔다.”


-아버지의 실망이 컸겠다. “말해 뭐하겠는가. 아버지는 만년에 은퇴하면 고향에 가서 나와 조그만 약국을 경영하는 게 꿈이었다. 그래서 유달리 사랑했던 당신 딸에게 약대 진학을 권유했다. 나는 그 반대다. 시나 소설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학부를 졸업하면 국문과 대학원에 진학해서 글을 쓰고 싶었다. 다 지나간 젊은 날의 슬픈 꿈이지만.”


-혁명가의 아내로서의 삶은 어땠나. “힘들었다. 결혼을 했더니 시댁 경조사 등 갑자기 챙길 일이 많아졌다. 가족을 뜻하는 ‘패밀리’라는 말에 노예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 옥탑방을 전전했다. 그래도 안양 버스종점에서 셋방 살 때가 좋았다. 그 당시 남편은 버스 운전기사로 일했다. 그러나 잠깐이고 늘 여기 번쩍 저기 번쩍 했다. 가정이라는 게 아예 없었다. 그는 늘 수배 중이었고. 그런 와중에 91년 터진 사노맹사건으로 내가 먼저 잡혀가 5년 살았다. 모진 고문 속에서도 꿋꿋이 버텼는데 어느 날 말실수로 도피 중이던 남편과 백태웅까지 잡혔다. 죄책감에 죽으려고 감방에서 20여 일간 단식했다. 몸이 많이 망가졌다. 사형구형을 받았던 남편은 7년반 살고 나왔다.”


-책에 보면 아버지 김해수는 당신에게는 증오의 대상이던 박정희에게 꽤 호감을 가진 것으로 나와 있다. “아버지는 박정희와 각별한 인연이 있다. 나 또한 일정 부분 호감을 가지고 있다. 한국 사람의 숙명 같았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았나. 친일청산 실패와 개발독재라는 방법이 문제였다. 그래도 아버지는 박정희의 배려 덕분에 최초로 국산 라디오 개발에 성공했다. 그러나 내가 감옥에 가게 되자 자랑스럽게 걸어두었던 대통령 박정희가 준 훈장을 서랍 속에 감추었다고 들었다.”


-아이도 없다고 들었다. “사실 남편과 같이 산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야만의 시대였다.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는 가정생활은 아예 없었다. 언젠가 예비군 훈련을 갔다 온 박 시인이 말했다. 수술해 버렸다고. 별 생각이 없었다. 아이를 갖지 않기로 서로간의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고 피차 느꼈다.”


-이제 할머니 모습도 보인다. 여전히 가슴은 투사인가. “할머니다.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거제도 작은 요양병원에서 이틀 일하고 나머지는 조그만 개인 사찰에서 밥을 짓고 찬거리를 준비하며 지낸다. 절집 말로 공양주 보살쯤 된다. 그래도 일이 많다. 하루 종일 쓸고 닦고 일한다. 그러다 짬 나면 틈틈이 대체 의약 공부를 한다. 산과 들에 널려 있는 초목이 다 약초다. 약초 공부가 재미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운동을 안 했으면 무얼 했을까. “헤르만 헤세가 좋았다. 『데미안』을 열심히 읽었다. 여고시절 각종 문학상을 휩쓸었다. 여행도 좋아했고 낯선 곳에 가면 시장에 가는 것이 취미다. 삶이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시대를 만나 낭만적인 문학소녀가 투사가 된 사연 많은 인생이다. 진주(眞珠)가 눈물을 상징한다고 했다. 이제 모두가 흘러간 물기 어린 삶이다.”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yule2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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