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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이 완성한 ‘천인무간’ 성리학, 조선 정치이념 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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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2호 23면

목은 이색 선생을 모셔놓은 문헌서원에선 목은 선생처럼 되도록 학생들을 가르쳤다. 오른쪽 아래의 건물이 위패를 모신 사당인 효정사이며 효정사 앞 건물이 유생들을 가르치던 진수당이다. 김춘식 기자

흔히 조선 오백년의 기틀을 만든 사람으로 삼봉 정도전을 꼽는다. 삼봉은 궁궐·종묘·사직·성균관의 자리를 정하고, 숭례문을 위시한 각 성문의 이름을 짓고, 『조선경국전』을 지어 조선 통치의 기초를 다졌다. 실로 위대한 업적이다. 하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이념으로 삼을 사상을 정착시키는 일이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나 위진남북조시대의 혼란은 당시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려시대 말기에 정치가 혼란하게 된 근본 원인도 당시의 정치이념이었던 불교가 타락해서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목은 이색(1328~1396)선생은 조선 건국의 사상적 토대인 성리학을 정착시켜놓은 주역이라 할 수 있다. 고려 말의 지식인들은 불교를 대신할 사상으로 주자가 완성한 중국의 성리학을 수용하여 정착시켰는데 그 대표자가 목은 선생이다. 목은 선생이 성리학을 정착시켜놓지 않았다면 태조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전복시키고 조선을 건국했더라도 나라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태조가 정치적으로 성공한 근본 원인은 목은 선생이 정착해놓은 성리학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은 선생에게는 학문을 이룬 사람의 위엄이 있었다. 공민왕이 목은과 초은(이인복 1308-1374)을 궁궐로 부를 때는 매양 좌우 신하들로 하여금 반드시 향을 피우게 했다. 이를 본 신돈이 공민왕에게 아뢰기를, “국왕이 신하를 보는데 어찌 공경함이 이와 같습니까?”라고 하자, 공민왕은 “네가 어찌 이 두 분의 도덕이 보통 선비와 다름을 알겠는가? 또 이색의 학문은 살과 피부를 버리고 골수만 빼낸 것이다. 그러기에 중국에서도 비교할 사람이 드무니 어찌 감히 함부로 대접할 것이겠느냐?”라고 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목은 선생이 개경으로 올라와 이성계의 사저로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성계는 크게 놀라 반기면서 목은을 상좌에 앉히고 꿇어앉아 술을 올린 적도 있었다.

유생들이 공부하던 진수당. 문 좌우에 유생들의 기숙사인 석척재, 존양재가 있다.

이성계, 무릎 꿇고 술 올린 적도성리학을 수입한 것은 안향 선생이지만, 성리학을 완전히 정착시킨 이는 목은 선생이었다. 성균관 대사성이 된 이래로 많은 학자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김구용·염흥방·문익점·정몽주·정도전·박의중·하륜·권근·이숭인·맹사성·길재·박은·이원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문하생 중에 주목해 볼 두 인물이 정몽주와 정도전이다.


고려 말의 민심은 불교를 떠났고, 불교 사상을 정치이념으로 삼고 있었던 고려왕실로부터도 떠났다. 정도전은 불교와 고려 왕실을 동시에 배척하려 한 반면, 정몽주는 불교는 배척하되 고려 왕실은 붙잡으려 했다. 민심은 정도전을 따랐다. 이것이 정도전이 성공하고 정몽주가 피살된 근본 원인이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성립된 뒤에는 불교를 공격할 필요도 없어졌고, 고려 왕실을 공격할 필요도 없어졌다. 오직 필요한 것은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었다. 그 때문에 정도전이 피살되고 정몽주가 복권되어 성균관의 문묘에 배향되었다.


문헌서원은 목은 선생을 모셔놓은 서원이다. 충남 서천군 기산면 서원로 172번길 66 기린봉 자락에 있다. 지금은 서해안 고속도로와 서천공주고속도로가 개통돼 훨씬 가까워졌다. 문헌서원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69년 유림들의 뜻으로 지금의 위치에 복원됐다. 서원은 오늘날의 사립 중고등학교에 해당하지만, 배움의 내용은 오늘날의 그것과 다르다. 서원교육의 목적은 사람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드는 효과적인 방법은 가까이 계셨던 인물 중에서 본보기가 될 만한 인물을 모셔놓고 그와 닮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문헌서원에서는 목은 선생을 모셔놓고 목은 선생처럼 되도록 학생들을 가르쳤다.


목은 선생의 위대함은 중국의 성리학을 그대로 수용한게 아니라 우리의 토양에 맞게 뜯어고쳤다는 점이다. 중국 성리학의 핵심은 천인합일(天人合一)사상이다. 사람이 사람 속에 있는 하늘의 요소인 본성을 잘 발휘하고 길러서 하늘처럼 돼야 한다는 사상이다. 그러나 목은 선생 성리학의 사상적 핵심은 천인무간(天人無間)사상이다. 하늘과 사람이 애초에 사이가 없이 하나라는 의미다. 하늘과 사람이 본래부터 사이가 없다는 것은 사람이 본래부터 하늘과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하늘과 사람이 본래 하나라면 하늘처럼 살지 못하는 현재의 자기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고, 천국처럼 되어 있지 않은 지금의 세상이 안타깝기도 하며, 하늘이 되어 세상을 초연하게 바라볼 수도 있다.목은 선생의 사상에는 이 세 가지가 다 들어있다. 하늘처럼 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자기의 본래모습을 깨닫기 위한 철저한 수양철학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회재 이언적선생을 거쳐 퇴계 이황 선생에게로 이어진다. 천국처럼 되어 있지 않은 지금의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은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기 위한 강렬한 정치적 실천철학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정암 조광조 선생을 거쳐 율곡 이이 선생으로 이어진다. 하늘이 되어 세상을 초연하게 바라보는 철학은 모든 철학을 하나로 아우르는 회통철학으로 나타난다. 이는 매월당 김시습 선생과 화담 서경덕을 거쳐 남명 조식 선생으로 이어진다. 이 세 줄기의 사상이 모두 목은 선생의 사상에서 발원하는 것이다.

1 바른 마음으로 나아가 제대로 공부하라는 진수당 현판. 진수당 안쪽에 문헌서원 현판이 걸려있다.

진수문 지나니 좌우에 기숙사문헌서원에 당도하니 먼저 홍살문이 맞아주었다. 홍살문은 성현이 계시는 성스러운?지역임을 표시하는 문이다. 홍살문을 들어가면서부터는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홍살문을 지나고, 오른쪽에 있는 연못과 누각을 지나니, 서원의 정문이 나왔다. 진수문(進修門)이라는 현판이 쓰여 있다. 진수란 진덕수업(進德修業), 즉 바른 마음으로 나아가 제대로 공부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진수문을 들어서니 좌우에 학생들의 기숙사가 보인다. 서쪽에 있는 기숙사가 서재(西齋)이고, 오른쪽에 있는 기숙사가 동재(東齋)다. 서재에는 석척재(夕?齋)란 현판이 걸려있다. 석척이란 『주역』 건괘에 나오는 말로, '아침부터 부지런히 노력하고 저녁때까지 속을 태우며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동재에는 존양재(存養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존양이란 『맹자』에 나오는 존기심양기성(存其心養其性)에서 따온 말이다. '마음을 흩트러뜨리지 않고 잘 보존하여 자기의 타고난 본성을 잘 기른다'는 뜻이다. 동재와 서재를 지나면 정면에 교실이 있다. 진수당(進修堂)이라는 현판이 눈길을 끈다. 바른 마음으로 나아가 제대로 공부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뒤켠으로 돌아가니 목은 선생과 그의 부친인 이곡 선생을 모신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효도하는 마음으로 편안해진다’는 효정사(孝靖寺)란 현판이 걸려 있다.

2 서원 입구에 자리한 홍살문. 홍살문은 성현을 모신 성스러운 지역임을 표시하는 상징이다.

사당에 들어가 목은 선생에게 예를 올린다. 왼편에 있는 영당에도 들렀다. 목은 선생의 영정 앞에 절을 올리니 지금의 혼란을 염려하는 선생의 따뜻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영당을 나와 효정사의 오른쪽에 있는 장판각로 발길을 옮긴다. 이곳엔 가정 선생과 목은 선생의 문집을 출간하기 위한 판각이 옛 상태로 잘 보존돼 있다.


목은 선생의 묘소는 기린봉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오색 찬란한 빛깔의 털에 이마에 기다란 뿔이 달린 전설의 동물인 기린은 세상을 구제하는 성인이 나온다는 것을 알리는 동물로 통한다. 기린봉을 보고 있자니 ‘세상을 구할 성인이 여기 묻혀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묘소에서 예를 올린 뒤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마치 고향을 찾았을 때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어서다. 다시 서원 앞까지 내려와 앞산을 바라보니 마치 책상 같이 생긴 숭정산이 눈에 들어왔다. 목은 선생이 어릴 때 공부했던 절이 있던 바로 그 산이다.


서원의 앞에는 한옥으로 된 호텔이 지어져 있다. 언젠가 이 호텔에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머물면서 목은 선생의 품에 안겨도 보고 숭정산에 올라 목은 선생의 체취를 흠뻑 맡아보기로 하자.


이기동성균관대 동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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