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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왕정 벗어나 자유 갈구한 장엄한 외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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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6호 24면

젊은 시절 실러의 초상화.

루드비히 반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좋아하는 음악애호가들이 많다. 그런데 마지막 4악장 합창 파트에서 울려 퍼지는 장엄하고도 힘찬, 불멸의 노래 가사가 무슨 뜻인지를 잘 모르는 분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그 가사는 독일의 문호이자 천재 극작가인 프리드리히 실러가 1786년에 발표한 ‘환희의 송가(An die Freude)’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다. 베토벤은 일찍이 10대 시절부터 이 시에 관심을 보이면서 언젠가는 그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만들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교향곡 9번에 환희의 송가 시구를 붙여 실제로 곡을 쓴 것은 30여 년이 흐른 후였다. 그가 47세의 나이였던 1817년, 런던 필하모닉 협회의 의뢰를 받고 1822년에 이 교향곡의 작곡을 시작하여 1824년에야 작업을 완성하였다. 1824년 5월 7일,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베토벤과 미하엘 움라우프의 지휘로 비엔나에서 초연되었다. 우렁찬 합창으로 4악장이 끝나자 청중은 무려 다섯 번의 기립박수로 천재 음악가의 독창적 교향곡에 뜨거운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이 무렵 베토벤은 청력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관중의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가 알토 독창자가 그의 등을 돌려 청중의 환호에 답례하도록 도왔다는 일도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오, 친구들이여’ 첫 소절 짜릿한 감동합창의 시작부분에서 베이스 독창자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장엄하게, “오, 친구들이여, 이러한 소리 말고 좀 더 기쁜 노래를 불러요!”하고 노래하는 첫 소절은 필자에게 언제나 가슴 짜릿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 대목을 위해서 9번 교향곡의 앞 세 악장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4악장의 시작을 알리는 ‘오, 친구들이여!’ 외침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소망의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당시 그 합창을 듣는 유럽인들은 절대군주의 시대가 가고 자유·평등·박애의 새 시대가 열리는 역사의 신호 나팔 소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환희의 송가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이어진다.


“아름다운 신들의 불꽃같이 빛나는 기쁨이여, 엘리시움을 지키는 딸들이여, 우리는 그 휘황찬란한 문을 열고 성역에 발을 들여 놓는다. 이 세상의 관습 때문에 감히 가보지 못했던 그 길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한 형제가 되는 그 곳으로 부드럽게 날게 저어서 가보자….”


‘환희의 송가’에는 유럽인이면 잘 알 수 있는 신화와 전설이 숨 쉬고 있고 많은 은유와 알레고리(allegory)가 도처에 숨겨져 있다. 그 알레고리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언뜻 읽으면 잘 알 수 없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절대군주가 지배하던 억압의 시대를 벗어나서 모든 시민이 영웅이 되는 그 곳에 모여서 한 형제가 되어 기쁨을 함께 나누자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그리스어 ‘엘리시움(Elysium)’은 독일어로 ‘발할라(Walhalla)’로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바이킹이나 게르만 용사들이 죽어서 가는, 신화 속의 영웅궁전을 말한다. 엘레시움으로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은 신에 의해 선택된 자들, 바르게 산 자들, 영웅적인 행위를 한 자들인데 이들은 사후에 엘리시움에서 축복되고 행복한 삶을 산다고 생각되었다. 오늘날 스포츠계에서 생애를 통해 우수한 성적을 올린 선택된 선수들의 이름이 등재되는 ‘명예의 전당’이라는 이름도 엘리시움에서 유래된 것이다. 실러의 ‘환희의 송가’에는 오랫동안 닫혀있던 영웅의 전당이 모든 흙수저들에게 개방된다는 선언을 하고 있다. 성스러운 용사의 전당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던 모든 인습의 장벽이 무너지고 착하게 살아간 시민들이 부드럽게 날아가서 기쁨의 노래를 함께 부른다는, 자유와 통합을 상징하는 장엄한 노래를 실러는 18세기의 유럽인들에게 목소리 높게 외치고 싶었던 것이다.


자유·평등·박애… 새 시대 열림을 칭송27세의 실러가 ‘환희의 송가’를 발표했던 그 당시는 독일 역사상 ‘질풍과 노도(Sturm und Drang)’, 문자 그대로 ‘사나운 바람과 성난 파도’의 시대였다. 질풍과 노도의 시기는 대략 1767년부터 1787년 무렵의 시기로서 당시 유럽의 청년세대들이 공감하고 있던 삶의 감정과 결속을 지칭하는 문예사조의 명칭이다. 질풍과 노도시기는 유럽에서 절대주의 왕정에서부터 계몽시대로 이행하는 과도기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이 시기의 유럽국가들에서 청년들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시대 분위기가 문학작품을 통해서 활발히 표출되었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1774년에 발표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기혼녀를 사랑하던 젊은이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는 줄거리의 소설인데, 질풍과 노도시기를 살아가던 많은 젊은이들의 격정과 정열, 반항과 좌절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서 그들의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소설이었다.

바이마르에 있는 실러가 살던 집.

프리드리히 실러는 1759년 독일의 남서쪽 조그만 마을 마르바흐에서 군 장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시절부터 그는 드라마 두 편을 습작하는 등 문학에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그는 슈투트가르트의 군사학교에 보내졌고 거기서 7년간 엄격한 군대교육을 받았다. 나중에 군의관이 되기 위해 의학을 공부하는 틈틈이 당시 질풍과 노도시대의 인기 작가들의 작품들을 몰래 읽곤 했다. 17세 때 그는 첫 자작시 ‘저녁’을 발표할 정도로 수준 높은 문학적 소양을 갖추었다. 실러는 그 후 군의관으로 임용되어 군부대를 옮겨 다니면서 근무하게 되었다.


실러 생애에 한 획을 그은 대사건은 그가 군대에 있으면서 5년간 틈틈이 쓴 드라마 작품 ‘군도 (群盜, 도적들)’를 1781년에 익명으로 출간했을 때부터다. 그러나 그의 첫 드라마 ‘군도’는 당시 엄중한 분위기로 마땅히 공연할 곳을 찾지 못하다가 이듬해 자유로운 분위기의 상업도시 만하임에서 가까스로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드라마 군도는 다분히 혁명적인 줄거리를 갖고 있었다. 한 귀족가문에 칼과 프란츠 두 아들이 있었는데, 백작인 아버지는 두뇌가 명석한 장남 칼을 상속자로 지명하고, 무능한 동생 프란츠에게는 아무런 상속 재산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칼은 타지에 가서 대학 공부를 하면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기게 되었고 그 결과 큰 빚을 지게 된다. 프란츠는 형이 빚을 진 것을 침소봉대하여 형에 대한 악평과 모함으로 아버지의 신뢰에 금이 가게하고 자신이 상속자가 되는 음모를 실행에 옮겼다. 칼은 고향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동생을 응징하기 위해 자기 친구들로 구성된 도적떼들을 이끌고 성을 공격해서 승리함으로써 정의를 바로 세우게 되었고 동생 프란츠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군도’의 만하임 초연은 젊은 관객들의 환호성 속에 대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거짓된 말과 불의한 방법으로 아버지의 재산과 상속권을 가로챈 음흉한 프란츠의 모습에서 당시 절대군주와 귀족들의 수탈을 보았고, 불의한 세력을 무찌르고 승리한 칼과 친구들의 모습에서 정의로운 시민혁명의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군도’의 성공적 초연으로 실러는 고초를 겪게 된다. 군 최고통수권자인 뷔르템베르크의 공작은 군인 신분으로 불온하고 반동적인 드라마를 써서 세상을 시끄럽게 한 실러의 처벌을 명하여 14일 간 감옥에 가두었다. 그 후에도 실러에 대한 군 당국의 통제가 심해지자 그는 질풍과 노도를 무릅쓰고 자유를 찾아 탈영을 감행하게 된다. 슈투트가르트 군영을 탈출한 그는 자신을 극작가로 성공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만하임으로 가서 그 곳 극장의 연극 감독으로 취직하게 된다. 그 후 그는 드라마 ‘돈 카를로스’를 완성하고 바이마르로 옮겨 간다.

바이마르에 있는 괴테와 실러(오른쪽)의 동상.

1787년, 그는 문단의 대선배 괴테를 운명적으로 만나 바이마르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토론과 협업으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일생의 동반자가 된다. 오늘날에도 바이마르 국립극장 앞에는 괴테와 실러가 다정하게 손잡고 있는 동상(사진)을 볼 수 있다.


드라마 ‘군도’ ‘돈 카를로스’, 그리고 ‘윌리엄 텔’로 잘 알려진 실러가 쓴 ‘환희의 송가’는 프랑스 대혁명 직전 무렵 ‘시민이 주인 되는 새로운 시대’를 간절히 염원하던 유럽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시에는 구시대의 억압과 모순을 타파하고 온 유럽인들이 손에 손을 잡고 새로운 시대를 향해 달려가고자 하는 비전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초연 이후 오랫동안 많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실러의 ‘환희의 송가’가 오랜 세월을 지나 다시금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차 대전 후 동·서독이 분단된 냉전 시기였다. 1956년부터 1968년까지 동·서독은 올림픽경기에서 단일팀을 이루어 출전할 때 각종 시상식과 개막식에서 동독과 서독은 합의에 의해 개별 국가대신에 베토벤 9번 교향곡의 합창 부분을 단일국가처럼 연주하였다. 이것은 이 ‘환희의 송가’가 서독뿐 아니라 동독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실제로 동독의 공산정권은 절대군주의 압제로부터 자유와 혁명을 갈구한 실러의 가사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잘 부합된다고 판단하여 이 곡을 오랫동안 동·서독 대표팀을 위한 통합국가로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1989년, 동독시민들의 봉기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한 달이 지난 12월 초에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를 역임한 레너드 번스타인이 동베를린으로 날아와 현지 오케스트라와 합창단과 함께 베를린 장벽 붕괴를 축하하는 특별 콘서트를 열게 됐다. 그 때 주 레퍼터리로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연주함으로써 동독정권의 압제로부터 자유를 갈구하여 마침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동독시민들을 격려한 것은 물론, 독일 통일을 촉구하는 뜻 깊은 노래가 자유를 억압한 사회주의 정부가 있던 동베를린 땅에서 울려 퍼짐으로써 역사의 패러독스까지 보여주었다.


오늘날 베토벤 9번 합창곡은 독일인 뿐 아니라 자유와 통합을 사랑하는 세계의 모든 시민들과 단체들이 애호하는 노래가 되었다. 환희의 송가는 1972년 유럽연합의회, 그리고 1985년과 1993년 유럽연합이 결의에 의해 ‘유럽의 노래’로 공식 제정하였다. 올해 프랑스에서 개최되는 ‘유로 2016’ 축구대회와 2018년 러시아 FIFA 월드컵 대회의 테마 음악으로도 정해져 있다.


민초의 저항가요로도 널리 사용돼한편으로 ‘환희의 송가’는 오래 전부터 독재와 권위주의적 정권에 맞서는 민초들의 저항가요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1970년대 내내 피노체트의 군사독재에 저항하여 시위를 벌이던 칠레의 민주 시민들이 저항가로 애창하던 노래로 알려졌고, 1989년 중국 천안문 사태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이 환희의 송가를 인터넷으로 유포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2011년, 국토를 강타한 동북대지진과 쓰나미 피해 직후 일본에서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국민의 단결을 호소하는 의미로 공식 모임에서 연주된 적도 있다.


오늘도 지구촌 어디에선가 권력자의 압제로부터 시민의 자유를 갈구하던 아름다운 청년 실러의 ‘환희의 송가’는 자유를 사랑하고 지키고자 하는 용감한 사람들에 의해 불려지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암울한 시대에 계란으로 바위를 움직이게 한, 인문학의 위대한 승리를 실러와 베토벤이 합작한 ‘환희의 송가’에서 목도하면서 필자는 꿈에도 그리던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는 그날, 우리는 북한 동포와 함께 무슨 노래를 부를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오늘날 국경을 초월하여 활동하는 글로벌 기업에는 인종과 국적·생각이 다양한 근로자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이들을 기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로 묶는 것은 자유와 평등, 이웃사랑, 그리고 통합의 기업 이념이다. 실러의 ‘환희의 송가’에는 지구촌이 온통 글로벌 기업의 활동 무대가 되는, 인류의 200년 후를 내다 본 이상이 담겨있다.


김성국이화여자대학교 경영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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