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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미 데들리(1955)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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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호 24면

[영화 속에서]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진 시대 판도라 상자 열려도 세상은 불변

영화평론가

질주하는 여인의 거친 숨결로 시작하는 ‘키스 미 데들리’의 첫 화면은 단박에 눈에 들어온다. 그만큼 인상적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녀가 숨가쁘게 뛰었던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시민 케인’이 톰슨 기자를 따라 주인공이 유언으로 던진 ‘로즈 버드’의 의미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영화였다면, ‘멋진 인생’이 고통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도 사회적 명분과 선의지를 부여잡는 영화였다면,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은 이 작품에서 이전 세대의 영화들과 과감하게 결별을 선언한다. 그가 창조해 낸 주인공들은 대의명분이나 목표를 찾으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과 악의 경계선도 흐릿하다. 그것은 전후 세대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영화 속 주인공 마이크 해머는 정의에 대한 통념은 일찌감치 내던져 버렸을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악당보다 더 악랄한 인간이다. 알드리치의 영화 중에는 심지어 악당이 주인공보다 더 근사할 때도 있다. ‘베라 크루즈’에서 멕시코 악당 역을 맡은 버트 랭카스터가 대표적인 경우다.

영화의 포스터. 추리소설 작가 미키 스필레인의 ‘마이크 해머’ 시리즈 중 동명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 [사진 마티]

“현실의 폭력이 영화의 폭력 만든다”
선과 악이 무너져 버린 시대, 허황된 명분을 쫓아 예술가들을 추방하고, 지식인들의 비판의식을 잠재워 버렸던 냉전 시대의 한가운데에 반골 기질을 드러낸 로버트 알드리치가 우뚝 서 있다. 영화 속 극단적인 폭력을 두고 비판이 일 때마다, 그는 “현실과 삶의 폭력이 바로 영화의 폭력을 만드는 것”이라며 돌직구를 날렸다. 그것은 냉전 시대 속에서 쉬지 않고 영화를 만들었던 알드리치의 영화 철학이었다.
숨 가쁘게 질주하던 여인의 이름은 크리스티나. 자동차를 멈춰 세운 크리스티나는 사립탐정 마이크 해머가 운전하는 차에 뛰어오른다. 그러나 안도의 순간도 잠시. 이번에 화면을 채우는 것은 고문을 당하는 그녀의 비명과 길게 뻗은 다리뿐이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붙잡혔고, 마이크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크리스티나의 배후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비록 부인들의 요청으로 남편들의 뒷조사를 하며 양측 모두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파렴치한 탐정이지만 크리스티나가 숨겨둔 ‘상자’는 그에게 어떤 ‘임무’를 부여한다. 이 상자의 실체는 경찰 팻에 의해 세 단어로 묘사된다.
‘키스 미 데들리’에서 수수께끼의 퍼즐처럼 등장하는 세 단어는 상자가 핵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알려준다. 그것은 이 영화가 핵의 공포를 다루고 있는 탐정영화이며, 일찌감치 그 비밀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영화라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비밀이 풀렸음에도, 구소련의 스파이로 보이는 소버린의 정체나 마이크를 속여 상자를 탈취한 릴리의 정체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묘사할 뿐이다. 불행한 것은 핵이라는 비밀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죽임을 당해야 했던 시대성이다. 핵의 위압감에 압도당한 채 모두가 저마다의 이익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희생자 중 하나인 자동차 정비공 닉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바바 붐”은 시대를 향한 농담인 동시에 핵의 공포를 희화하는 말이었다. 1950년대는 또한 핵의 공포와 함께 매카시즘의 열풍이 퍼지던 시기였다. 수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영화 속 닉이나 크리스티나처럼 희생양이 되던 냉전 시대의 한가운데였다.

시대의 공포에 맞서 삐딱하게 세상 응시
알드리치는 이같은 시대의 공포에 맞서 삐딱하게 보기를 선택한다. 냇 킹 콜의 음악이 흐르고 크리스티나를 태운 차의 앞창을 배경으로 ‘키스 미 데들리’라는 제목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시작 화면이나 영화 전반에 걸쳐 구현된 사선의 구도는 뻔한 탐정영화 속에서 알드리치가 가려고 했던 길을 대변해준다. 삐딱한 시선으로 영화라는 것이 하나의 악몽일 수 있음을, 그 악몽만으로도 거대한 세계의 비판과 직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숨겨져 온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다. 그러나 상자가 열려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죽음을 만들 뿐이다. 알드리치는 매번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면서 세상의 모든 판도라를 열고자 했다. 그는 보여준다. 세상의 비밀은 판도라의 상자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그 자체라는 것을. 할 수 있다면 영화를 통해 세상 그 자체를 열어젖혀야만 한다는 것을. 알드리치처럼, 삐딱하게.

[영화 밖으로] 비밀은 ‘비밀 유지’될 때만 매력 내용 알려지면 봄눈 녹듯 허망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은 비밀에 접근해 가는 해머의 급박한 모험을 통해 우리를 영화 속으로 빨아들인다. 적절한 하이앵글과 로우앵글 기법, 냇 킹 콜과 슈베르트의 선율로 충만한 흑백 영상의 강력한 미장센도 비밀을 향한 우리의 불안감과 호기심을 증폭시키지만, 무엇보다 주요한 미끼는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그 비밀이 어떤 검은 상자와 관련되었다는 은밀한 ‘정보’다. 이 상자에 몰입하는 순간, 우리는 저예산 B급 영화의 조악함이나 스토리 전개의 엉성함을 거의 느끼지 못하게 된다.

대중 철학자

과묵한 사람이 매력적인 것과 같아
검은 상자의 비밀은 영화 종반부에 해머의 친구이자 정부요원인 팻이 말한 세 단어로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맨해튼 프로젝트, 로스앨러모스, 트리니티!”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소련, 영국, 그리고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아니 정확히 말해 완전히 파멸하지 않기 위해 원자폭탄 제조법을 기를 쓰고 먼저 얻으려 한다. 역사는 최종 승자로 미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렇다. 바로 이 원자폭탄 제조계획이 ‘맨해튼 프로젝트’이고, 그것이 이루어졌던 장소가 ‘로스앨러모스’이며, 시험용으로 만든 최초의 원자폭탄 이름이 바로 ‘트리니티’였다. 검은 상자 안에는 바로 수십만, 아니 수백만 명을 태워죽일 수 있는 원자폭탄의 가공할 파괴력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영화를 통해 알드리치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은 1955년에 전 세계를 불안에 떨게 했던 원자력의 잔혹함을 경고한 것일까, 아니면 권력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인간 군상들의 야비한 행각을 냉소적으로 보여주려던 것일까.
나는 다른 측면을 좀 더 크게 느꼈다. ‘비밀’. 감독이 내용과 형식을 통해 일관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바로 ‘비밀’에 관한 이야기 아니었을까. 아니 정확히 말해 ‘비밀의 비밀’을 일찌감치 간파했기에 알드리치는 도저한 영화 감독으로 평론가들과 후배 감독들로부터 지금까지도 상찬을 받는 것이 아닐까.
검은 상자의 비밀이 알려지는 순간, 바로 그 순간 ‘키스 미 데들리’는 사실상 끝난 것이다. 남은 것은 이제 해머나 관객들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그 상자가 열리는지를 확인하는 일뿐.
알드리치는 ‘비밀은 비밀로 유지될 때에만 매력을 가진다’는 사실, 간단히 말해 신비의 신비, 혹은 비밀의 비밀을 직감했던 감독이다. 비밀이 비밀로 유지되는 순간에만, 그것은 타인의 호기심과 관심, 나아가 애정을 자극할 수 있다. 성급한 관객들이 왜 빨리 검은 상자의 내용물을 공개하지 않느냐고 투정부린다고 해서, 그들의 요구에 섣불리 넘어가서는 안 된다. 요구에 응답하는 순간, 관객들은 영화가 재미없고 빤하다고 투덜거릴 테니 말이다.
그래서 수다스러운 사람보다 과묵한 사람이 더 매력적인 법이고, 예상치 못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관심을 받는 법이다. 심지어 밝은 화장보다 짙은 스모키 화장이, 파란색이나 노란색 옷보다 검은색이나 심홍색 옷을 입은 여인이 더 섹시해 보이기도 한다.

비밀의 실제 중요치 않은 비밀의 세계
영화나 소설, 그리고 예술만이 그럴까.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순간, 우리는 타인에게서 무관심의 대상, 혹은 권태의 대상이 된다. 철학자 짐멜은 진정으로 ‘분별’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에게라도 모든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분별의 심리학?이란 논문에서 말한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고 있다고 서로의 심리를 모르는 게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과거의 도취를 상실한 채 무미건조해지고 서로의 관계들은 그 생명력이 마비된다. (…) 생산적인 깊이를 지닌 관계들은 마지막으로 드러난 모습 뒤에서 언제나 가장 최후에 드러날 모습을 예감하고 존중하며, 또한 확실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도 매일 새롭게 정복하도록 자극한다.”
우리도 생산적 깊이를 가진 관계를 위해 각자 검은 상자 하나쯤 지니고 살면 어떨까. 자신만 열 수 있는 금고를 하나 장만해도 좋겠다. 안이 텅 비어 있어도 별무상관이다. ‘뻥이야’라는 글이 쓰인 종이 한 장을 넣어 놓아도 그럴싸하겠다. 어차피 비밀의 세계에서 비밀의 실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 안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 비밀은 봄눈처럼 이미 사라져버린 뒤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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