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버릇’ 된 추경, 내년 예산 써보지도 않고 벌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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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내년 예산안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론’이 불거졌다. 새누리당은 지난 23일 당정협의에서 “추경을 내년 2월까지 편성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더불어민주당도 지난 19일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지금부터 준비를 시작해 1분기에는 추경편성을 완료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자료:기획재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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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도 예산이 국회를 통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가운데 이른 추경 편성론이 나온 건 이례적이다. 그만큼 한국 경제의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는 뜻이다. 10월 광공업생산은 전달보다 1.7% 감소했다. 경기를 홀로 지탱해온 건설투자 역시 주택경기가 냉각되며 전월 대비 0.8% 줄었다. 제조업 취업자는 지난달까지 5개월째 감소하는 등 기업 구조조정에 따른 ‘고용절벽’이 현실화하고 있다.

자료:기획재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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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경기 사정은 더 악화할 거란 예상이 지배적이다. 주요 기관들은 이미 내년 성장률이 2%대 초반에 머물 걸로 전망했다. 이런 가운데 경기 부양을 위해 쓸 돈은 제한적이다. 정부가 경기 상황을 오판하며 내년 예산 지출 규모를 너무 작게 잡아 조기 추경 편성론을 자초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예산을 편성하며 내년 경상성장률을 4.1%(실질 성장률 3% + 물가상승률 1.1%)로 다른 기관보다 높게 추산했다. 이를 근거로 한 내년 지출 예산은 400조5000억원(국회 통과 예산안)이다. 사상 처음 400조원을 넘겨 ‘수퍼 예산’이라고 불렸다.

정부, 경기 오판해 지출규모 낮춰
“정치권은 대선 의식 행보” 비판
“나라빚 늘면 피해는 납세자에게”
효율성 높은 재정집행이 먼저

하지만 뜯어보면 ‘긴축’에 더 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21일 기자간담회에서 “내년 정부의 재정 정책이 완화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자료:기획재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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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내년 예산 지출 증가율(본예산)은 전년대비 3.7%로 올해(2.9%)보다는 높지만 2011~2015년 4~5%대의 증가율에 비해선 낮다. 특히 올해 추경을 포함한 지출액(398조5000억원)과 비교하면 내년도 예산 지출 증가율은 0.5%에 머문다.

정부도 벌써 내년 성장률 전망을 낮출 예정이다. 29일 발표할 ‘2017년 경제정책방향’을 통해 내년 성장률 전망을 2%대로 조정한다는 방침이다. 내년 본예산을 찔 때 예상한 성장률(3%)을 2017년이 시작하기도 전에 2%대로 낮추는 셈이다.

정부는 이처럼 다음해 성장률 전망을 낙관적으로 하고 예산을 짰다가 이후 성장률을 하향 조정한 뒤 경기 대응을 위해 추경을 편성하는 일을 ‘연례 행사’처럼 반복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에만 추경이 편성된 횟수는 9차례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벌써 세 번 추경이 편성됐다. 정부의 취약한 경기 예측과 대응 능력이 드러난 것이다.

백웅기 한국개발원(KDI)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정확한 규모도 산출하지 않고 무조건 추경을 편성하자는 주장은 정치권의 대선을 의식한 행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가 예산을 상반기에 조기 집행하기로 한만큼 집행 효과를 지켜본 후 추경 규모를 정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국가채무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40%에 이르는 상황에서 추경 편성은 보다 신중히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안창남 강남대 세무학과 교수는 “무턱대고 추경을 편성해 나랏빚을 늘리면 피해는 결국 납세자에게 돌아간다”며 “추경이 필요하다면 해야하지만 재정 상황을 감안해 나랏돈이 쓸 곳에 제대로 쓰이도록 재정 집행의 효율성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곤혹스런 모습이다. 일단 조기 추경 편성에 신중한 입장이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내년에 2% 초·중반의 경제성장률이 불가피하다고 판단되면 추경 편성을 검토 하겠다”며 “내년 1분기 지표를 보고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2월 추경은 외환위기를 겪었던 1998년이 유일하다. 1분기(1~3월)로 범위를 넓혀도 추경 편성 사례는 98, 99년과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가 있던 2009년 세 차례 뿐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예산을 쓰기도 전에 추경 편성을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내년 추경 편성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세종=하남현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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