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대표의 운신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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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위·소요사태가 전국적으로 확산 일로에 있고 종교계 등 의 동향도 범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데도 이에 대한 정치권의 대응은 여전히 겉돌고만 있다.
곧 정상화되리라 던 국회는 민주당의 불참결정으로 어렵게 되었고, 「노-김 회담」 도 현재로서는 언제 성사될지 불투명해 졌다.
그나마 한 가닥 다행인 것은 민정당이 지금의 위기상황을 벗어나는 길은 유연한 정치적 대응밖에 없다는 결단을 내린 듯한 조짐을 보인 점이다.
그러나 민정당이나 노태우 대표의 이른바 「운신폭」으로 「유연한 대응」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야권과 시위 학생의 요구는 한마디로 4·13조치의 철회인데, 이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할 수 없는데 민정당의 고민이 있는 것 같다.
민정당은 대표회담이 열릴 경우「4·13」을 제외한 모든 현안의 협상용의를 표명했다. 협상 테이블에서 논의할 대상 가운데는 김영삼 총재가 제의한 「민주화 공동선언」 과 구속자 석방, 김대중씨 가택연금 완화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 같은 제스처는 사태를 푸는데 중요한 구실을 할 것으로 보아도 된다. 그러나 야권은 「4· 13」 이란 장애가 제거되지 않는 한 실질적인 대화진전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야당 역시 대화를 통한 사태해결이 바람직하다는 근본인식은 같다고 믿는다. 다만 거기에도 김 총재의 발목에 재야의 압력이 걸려 있는데 문제가 있다.
거듭 지적하지만 여야가 각기 나름대로 갖고있는 내부적인 이견이나 갈등을 극복하지 않고는 사태수습의 길은 열릴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여야가 함께 상대방에 대한 요구의 수위를 낮추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대화에 나설 대표에게 재량권을 주는 분위기부터 조성할 것을 당부하고자 한다.
여당은 여당대로 노 대표가 실질적으로 여권의 집약된 의견을 펼 수 있도록 운신폭을 넓혀 주어야 하고, 같은 맥락에서 야당도 김 총재가 재야를 포함한 모든 야권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도록 專權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여야 대표회담이 열릴 때 실질적인 진전과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특히 야당의 경우 백인백색의 의견에 밀려 일단 결정된 당론이 뒤집히는 일이 되풀이 된다면 사태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함은 물론 야당의 정치력에 대한 국민의 불신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협상의 성공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야간에 가로 놓여있는 불신부터 제거하는 일이다.
무슨 일이 터져야만 신뢰성과 도덕성을 강조하는 풍토는 오히려 국민간에 팽배한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결과만을 빚을 뿐이다.
권내에서의 불신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우려되는 것은 정치권 전체에 대한 불신이다. 이런 사태가 정말 온다면 정치적으로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이 되고 만다.
오늘의 위기국면을 정치권이 주도적으로 풀어야할 당위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정부의 제 기능을 바라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러나 강한 정부는 국민의 강력한 지지기반과 신뢰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신뢰를 쌓기 위해 당장 요구되는 것은 다짐이 아니라 실천이어야 한다. 야당도 마찬가지다. 야담이 강경하다고 해서 국민의 지지를 더 받는 것은 아니다. 완승만을 추구, 여야관계를 완전한 제로섬 상태로 몰아 넣어서는 사태는 해결될 수 없다. 이제야말로 고집을 버리고 한발짝 씩 물러서 국민을 위한다는 시각에서 대화와 안협을 서둘러 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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