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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다양성 영화 126편?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수입한 그곳! '영화사 진진'의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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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진진이 10주년을 맞았다. 영화사 진진의 이름으로, 국내 다양성 영화 시장의 격변기를 고스란히 헤쳐 온 김난숙 대표가 직접 그 시간을 돌아보며 소감을 전해 왔다.
※국내 개봉 연도 기준이며, 색으로 표시된 작품은 영화사 진진의 수입 혹은 배급작입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김난숙 영화사 진진 대표

“(영화사 진진이 설립된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소회를 글로 정리해 보라”는 재앙 같은 제안이 닥쳤다. 두려움과 설렘. 20~30년 넘은 영화사가 한둘이 아닌데, 이 무슨 부끄러움을 모르는 생색인가. 그 순간, 이 글을 읽을지도 모르는 지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솔직해져야겠다. 어쩌다 보니 10년이 흘렀다. 2006년 11월 동숭아트센터 구조 조정으로 인해 영상사업팀 전원이 분사(?)됐다. 그것이 영화사 진진의 첫 단추였다. 막연히 ‘열심히 해야겠다’ 혹은 ‘지금처럼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설마 망하기야 하겠어?’라는 ‘낭만 100% 아마추어리즘’으로 무장한 채, 당시 그 팀의 부서장이던 내가 대표를 맡았다.

동숭아트센터 영상사업팀이 준비했던 켄 로치 감독 특별전과 그해 열린 제59회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1만4000명)은 영화사 진진의 창립작이 되어야 했다. ‘개업운’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부터 재일 조선인을 다룬 다큐멘터리 ‘우리 학교’(2007, 김명준 감독, 3만4000명), 음악영화 ‘원스’(2007, 존 카니 감독, 23만2000명)까지 초창기 모든 개봉작이 시네필의 사랑을 받았다. 이후 영화사 진진이 운영하던,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상영관 하이퍼텍나다는 ‘낮술’(2009, 노영석 감독, 2만4000명)‘똥파리’(2009, 양익준 감독, 12만3000명)‘무산일기’(2011, 박정범 감독, 1만1000명) 등의 한국 독립영화가 새로운 관객과 만나는 장이 됐다. 멀티플렉스의 예술영화 전용관 사업이 가시화되는 시기였지만, 여전히 종로 씨네코아·광화문 씨네큐브를 찾는 관객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극장과 시네필의 ‘아름다운 시절(Belle Époque)’은 계속될 것만 같았다.

‘자객 섭은낭’(2월 4일 개봉, 1만5000명)의 허우샤오시엔 감독(뒷줄 오른쪽 둘째) 내한 당시, 김난숙 대표(가운데)와 영화사 진진 식구들, 부산국제영화제 홍효숙 프로그래머(뒷줄 오른쪽 셋째). 씨네코드선재의 영사실을 책임졌던 김재원 실장님.

‘자객 섭은낭’(2월 4일 개봉, 1만5000명)의 허우샤오시엔 감독(뒷줄 오른쪽 둘째) 내한 당시, 김난숙 대표(가운데)와 영화사 진진 식구들, 부산국제영화제 홍효숙 프로그래머(뒷줄 오른쪽 셋째).
씨네코드선재의 영사실을 책임졌던 김재원 실장님.

‘원스’의 대박부터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개봉까지

영화 `원스`

영화 `원스`

1만 달러 주고 산 ‘원스’의 성공은 믿기 힘들 정도였다. 14개관에서 소규모로 개봉했음에도 놀라운 좌석점유율을 기록하며 장기 상영으로 이어졌다. 말 그대로 ‘대박’이라 부를 만했다. 졸지에 나는 업계에서 ‘안목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원스’는 회사 동료와 함께 수입을 검토했던 작품이다. 수입 당시 마땅한 경쟁사가 없었던 이 영화에 대해 ‘다른 업체와 구매 경쟁이 붙었는데, 어찌어찌해서 영화사 진진이 사게 됐다’라는 ‘카더라’ 소식마저 돌았다. 성공의 열매는 달콤했고, 자신감의 착시 효과도 꽤 오래갔다. 존 카니 감독은 한국 극장가에서 ‘원스’가 거둔 이례적인 성공에 놀라워했고, 남자 주인공의 기타와 청바지에 색감을 더한 한국판 개봉 포스터도 만족스러워했다. 그는 감사의 의미로 아일랜드산 위스키를 사무실에 보내 주었다(이 위스키 아직 안 먹었는데…, 어디 있을까?).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2000년대 다양성 영화 시장에서 ‘관객 1만 명’이란 숫자는 여러 의미로 상징적이었다. 여느 수입사의 한 해 개봉작 중 절반 이상이 관객 1만 명을 넘기지 못했다. 결국 우리는 ‘다양성 영화 시장’이 아닌 ‘영화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러한 숙제를 안고 영화별 손익을 꼼꼼히 따졌다. 그 결과 배급부터 마케팅까지 모든 것을 자체 해결하는, 일명 ‘만성 피로’ 구조로 일하게 됐다. 지난 10년 동안 영화사 진진에서 개봉한 영화는 모두 126편이다.

3주에 1편 꼴로 개봉한 셈이다. 외화 개봉 과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는 ‘불가능한 숫자’라 말할 것이다. 그 쳇바퀴 같은 일상 속에서, 끈끈한 팀워크를 자랑하던 훌륭한 동료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출산·육아 혹은 개인적 시간과 업무를 병행할 수 없다는 상식적인 이유로 말이다. ‘이런 흐름을 어떻게 깰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제6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켄 로치 감독의 ‘자유로운 세계’(2008, 약 2000명)는 국내 개봉 결과가 참담했다. 이 영화는 서울아트시네마가 운영했던 선재아트홀 씨네코드선재의 재개관작이었다. 갑자기 로치 감독과 칸영화제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순간이 생각난다. 그가 ‘루킹 포 에릭’으로 초청된 2009년이었는지, ‘앤젤스 셰어:천사를 위한 위스키’(2013, 1만7000명, 티캐스트 수입·배급)로 방문한 2012년이었는지 확실치 않다. 프랑스 칸의 크루아제트 거리를 걷는데, 로치 감독이 내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당시 그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슬쩍 들여다봤다. 우리 동네 철물점 아저씨 같은 점퍼 차림에 두꺼운 뿔테 안경을 낀 왜소한 백발의 사나이. 그때 나는 로치 감독이 호텔 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

올해 그는 은퇴를 번복하고 ‘나, 다니엘 블레이크’(12월 8일 개봉)로 제69회 칸영화제를 찾았다. ‘또 켄 로치 감독? 아, 정말 대단하군.’ 칸영화제 출장을 앞두고 미리 받아 보았던 이 영화의 제목과 줄거리가 너무도 ‘켄 로치적’이어서 호기심이 생기지 않았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황금종려상을 다시 받지 않는 한, 아니 받는다한들 한국 외화 시장에서 그의 영화를 볼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아마 나를 포함해 5000명 내외일 거라 생각했다. 칸영화제가 후반으로 향할 무렵, 영국 친구들과 영화 세일즈사 직원들 사이에 이 영화를 둘러싼 이상한 입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무성한 소문 속에 나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았고, 평범하고 상식적이며 순진한 이웃 다니엘(데이브 존스)에게 무너져 버렸다. “올드한 데다 동어 반복적이며 단순한 구조라 특별히 할 이야기가 없는 영화”라는 일부 똑똑한 사람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날 함께 영화를 본 동료와 수입 여부에 대해 의논했다. 그도 올해 칸영화제에서 보았던 영화 가운데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제일 좋은 작품으로 꼽았다. 그날 밤 우리는 이 영화를 구입할 경우 회사 측이 감당해야 할 손해 범위를 계산했다. 다음 날에는 엄청나게 불평등한 계약 조건을 방어해 내려 애썼으나, 결국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사기 위해 생색투성이 영화 세일즈사의 제안을 군소리 없이 받아들였다. 우리는 ‘바보 같은 선택’에 만족했고, 더 이상 다른 영화는 사지 못했다. 돈이 없어서. 서울에 돌아온 새벽, 영국 공영 방송사 BBC 속보를 봤다. 로치 감독의 두 번째 황금종려상 수상이라니, 우리는 운이 너무 좋군.

하이퍼텍나다와 씨네코드선재의 추억

2008년에는 서울 대학로에서 북촌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2008년과 2009년은 다양성 영화계 선배·동료들과 ‘국내 다양성 영화 고정 관객은 1000명’이라는 씁쓸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때였다. 그러나 ‘식코’(2008, 마이클 무어 감독, 3만8000명, 스폰지이엔티 수입·배급)와 ‘렛미인’(2008,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 8만7000명, 씨네그루(주)다우기술·데이지엔터테인먼트 수입, 씨네그루(주)다우기술·영화사 구안 배급)이 관객의 지지를 받았다. 다양한 예술·독립영화가 등장하며 시장 확대 가능성이 점쳐지던 빅뱅의 시기였다. ‘낮은 목소리2’(1997, 변영주 감독) ‘영매: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2003, 박기복 감독) ‘송환’(2004, 김동원 감독) 같은 한국 다큐의 극장 개봉이 어렵사리 결정되던 이전과 달리, TV 다큐 감독들이 과감하게 극장으로 이동했다. 특히 이충렬 감독의 ‘워낭소리’(2009, 296만2000명, 인디스토리 배급)는 다큐 흥행 기록을 새로 썼다. 그러나 개봉 당일 전국에서 ‘워낭소리’를 전회 상영한 극장은 하이퍼텍나다가 유일했다. 물론 엄청난 흥행은 전국에 지점을 갖춘 멀티플렉스의 공이었다. 대학로에 위치한 예술영화 전용관 하이퍼텍나다는, 국내 최초 예술영화 전용관이었던 동숭씨네마텍의 후신이었다. 당시 하이퍼텍나다는 고정 프로그램 ‘다큐 인 나다’를 운영하며 다채로운 다큐의 기획 개봉을 적극 추진했다. 극장이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차별화된 기획을 내세울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새로운 관객층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의 밑그림이다. TV 다큐 인력이 극장으로 자리를 옮기던 2009년은 종교 다큐가 극장에 걸리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관객 9만7000명을 동원한 아마존 선교사 이야기 ‘소명’(신현원 감독, 영화사 구안 배급)이 대표적이다. 그해 씨네코드선재에서는 필립 그로닝 감독의 ‘위대한 침묵’을 개봉했다. 영화사 진진이 타깃 맞춤식 종교 마케팅을 처음 시도한 작품이다. ‘알프스 산맥의 침묵 봉쇄 수도원’을 소재로 다룬 상영 시간 168분짜리 다큐였다. 대사가 거의 없는 이 작품은 소리 소문도 없이 연일 매회 매진을 기록했다. 결국 단관 개봉으로 5만 명 넘는 관객을 만났고, 3주 뒤 메가박스 코엑스점 2개관에서도 상영해 누적 관객 ‘9만6000명’이라는 희귀한 기록을 세웠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종교별·시즌별 영화 시장은, 그렇게 한 극장의 위험 부담과 시도로 시작됐다.

씨네코드 선재

씨네코드 선재

2003년과 2004년에 동숭씨네마텍 1·2관이 연이어 폐관했고, 2011년에는 하이퍼텍나다가 끝내 문을 닫았다. 그리고 영화사 진진의 마지막 영화관 씨네코드선재도 2015년 11월 운영을 종료했다. 극장들의 폐관은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 줬다. 다가올 10년의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씨네코드선재의 마지막 상영작은 ‘마스터’(2013,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3만4000명). 최종 상영이 끝난 후, 어른으로 모시고 동료로 함께했던 20년 지기 영사실 실장님이 돌아서서 급히 눈물 훔치시는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그날을 나는 어떻게 기억할까. ‘로보트 태권V’(1977, 김청기 감독)와 ‘E.T.’(1984,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열광하던 나는, 1995년 종각역 근처 영화관 코아아트홀에서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1986년작 ‘희생’을 보다 졸며 자책했고, 1994년 국내 개봉된 레오 카락스 감독의 1986년작 ‘나쁜 피’를 보지 않은 친구들과 대화하는 것이 지루했다.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1995)과 대니 보일 감독의 ‘트레인스포팅’(1997)에 환호하는 나 자신이 좋았고, 그 무렵부터 ‘영화 일을 직업으로 택하면 먹고살 수 있을까?’ ‘영화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그때처럼 많은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이 업계에서 큰손이나 부자가 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영화 일은 그저 재미있고 좋아서 계속하는 거니까. 또, 여전히 ‘성실의 신화’와 ‘요행의 마법’ 사이에서 서성대고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

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

다양성 영화계에서 일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피나 바우쉬의 댄싱 드림즈’(2011, 안네 린셀·라이너 호프만 감독, 6000명)를 국내에 소개하며, 세계적인 안무가 피나 바우쉬의 절친한 친구이자 그에 관한 다큐를 연출한 감독을 알게 되었다.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4월 7일 개봉, 에단 호크 감독, 2만2000명)를 통해서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이자 에단 호크의 친구이며 저명한 피아니스트인 세이모어 번스타인을 만날 수 있었다. 또한 오멸 감독 덕분에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2013, 14만3000명) 개봉을 준비하며 ‘제주’라는 곳에 대해 조금 더 배우게 되었다(오멸 감독의 모든 영화를 영화사 진진이 배급했다). 잊을 수 없는 인연도 많다. “다큐로 돈벌기 어렵지 않느냐”며 끝까지 내레이션 비용을 받지 않았던 유명 아나운서도 있었다. 그리고 20년째 매년 세계 각지의 영화제와 필름 마켓에서 바이어와 셀러로 만나는 사람들. 모두 나와 함께 늙어 가는 여러 나라의 배급업 동지(?)들이다. 그들이 이렇게 말할 때 기분이 묘하다. “네가 좋아할 영화야, 꼭 봐!” “이건 네가 좋아할 영화가 아닌데?” 물론 내게 가장 소중한 만남은 이들이다. 극장을 폐관할 때마다 한걸음에 달려와 미안해 하던 열성 관객들, 한국 다양성 영화계를 이끄는 수입·배급사, 독립영화계를 책임지는 동료 영화인들. 여러분 모두 그리고 영화사 진진 식구들 전부가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이 온기가 느껴지는 한, 영화사 진진도 누군가의 다니엘이 되는 용기를 내겠습니다. 지난 10년,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꾸벅!

글=김난숙 영화사 진진 대표, 사진=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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