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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중국 대규모 사절단 이끌고 에너지 개발 박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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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호 6 면

지난달 5일 이슬람권의 휴일인 금요일을 맞아 정장을 차려입은 한 가족이 번화가인 타즈리시 스퀘어 로터리를 건너 모스크로 향하고 있다. 테헤란은 만성적인 교통 체증으로 도로 위에 차량과 사람이 얽혀 늘 붐비지만 의외로 클랙슨을 누르거나 재촉하는 경우는 드물다. 김창우 기자

이란의 수도 테헤란은 엘부르즈산맥 남쪽의 해발 1200m 고원에 자리 잡고 있다. 1795년 수도가 된 테헤란은 인구 300만 명을 기준으로 설계됐다. 하지만 수도권에 1200만 명이 모여들면서 테헤란은 극심한 환경오염과 도로 등 사회기반시설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교통 체증은 그 결과의 하나다. 지난달 15일에는 심각한 스모그가 발생하면서 3주간 412명이 숨지기도 했다.


테헤란은 교통 지옥으로 악명 높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진행한 한국·이란 언론 교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란 정부의 공식 초청을 받아 테헤란에 도착한 첫날인 지난달 4일부터 이란식 교통 질서의 정수를 체험할 수 있었다. 기자단을 태운 15인승 미니버스가 3차로에서 유턴을 시도하다 1차로에서 우회전하려는 승용차와 머리를 맞대고 힘겨루기를 한 것이다. 놀랍게도 두 운전자 모두 빵빵대지도, 욕설을 하지도 않고 묵묵히 제 갈 길을 갔다. 테헤란의 교통문화는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 해제를 둘러싼 혼돈스러운 상황을 상징하는 듯했다.

테헤란 그랜드 바자르의 석류주스 상점(왼쪽). 시장 옆 이맘 호메이니 모스크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사람들.

[트럼프 당선, 경제 활성화 걸림돌 걱정도]
지난달 9일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미국 대통령 당선을 보면서 이란인들은 핵협상 타결과 경제제재 해제가 무위로 돌아가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을 내비쳤다. 지난 1월 미국과 이란은 핵협상을 타결하며 경제제재 등을 해제하는 내용을 담은 포괄적공동행동계획(JCPOA)을 내놓았다. 무함마드 자파 사리 이란 문화종교부 차관은 한국 기자단과 만나 “가뜩이나 미국이 합의안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는데 합의안 파기를 공약으로 내세운 트럼프의 당선은 이란 경제 활성화에 걸림돌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경제 현장은 이 같은 정치적 공방과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 이란은 지난 11일 미국 항공업체 보잉으로부터 항공기 80대를 사들이는 계약을 마무리 지었다고 밝혔다. 파르하드 파르바레시 이란항공 최고경영자(CEO)는 “2018년부터 10년에 걸쳐 총 80대의 보잉 여객기를 도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총 166억 달러(약 19조원)짜리 계약이다. 이란에 미국 항공기를 수출하는 것은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37년 만에 처음이다. 에어버스와는 항공기 118대를 구입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9일에는 현대중공업이 이란 국영 해운사인 이리슬(IRISL)에 1만4500TEU급(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한 개) 대형 컨테이너선 4척 등 총 10척의 선박을 7억 달러(약 8300억원)에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정기선 현대중공업그룹 선박·해양영업본부 부문장은 “올 1월 경제제재가 풀린 뒤 이란이 처음 발주하는 선박을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며 “시장 선점과 수주절벽 극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13일에는 알렉산드르 노바크 러시아 에너지장관이 500여 명의 대규모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테헤란을 찾았다. 노바크 장관은 이날 이란 국영석유회사(NIOC)와 러시아 국영기업 가스프롬이 공동으로 이란 서부 국경지대의 체슈메코시 유전과 찬굴레 유전을 개발하는 내용의 양해각서(MOU)에 서명했다. 중국 국영석유회사인 중국석유천연가스(CNCP)와 중국석유화학(Sinopec·시노펙)도 이란 가스전과 정유단지에 투자하기로 했다.


유럽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NIOC는 지난 7일 네덜란드와 영국의 합작회사인 로열더치셸과 유전·가스전을 개발하는 내용의 MOU를 교환했다. NIOC는 프랑스 토탈과도 아자데간 유전 개발 협약을 맺었다. 현재 하루 평균 5만 배럴을 생산하는 이 유전에 50억 달러를 투자해 산유량을 30만∼32만 배럴로 늘리는 내용이다. 또 2006년 발견한 이란 남부 키시 가스전의 생산량을 늘리는데도 협력할 방침이다. 트럼프 정부가 정식 출범하기 전에 광범위한 협력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전 세계 기업은 이란으로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로열더치셸과도 유전 개발 협약 맺어]
이란은 매장량 기준으로 원유 4위, 천연가스 1위의 자원 부국이다. 엘부르즈산맥에서 흘러내리는 수자원 덕분에 중동에서는 유일하게 식량 자급자족이 가능한 농업국이기도 하다. 이란산 석류는 한국에도 수출되는 대표적인 특산품이다. 테헤란의 중앙시장에서 석류를 직접 짜서 주는 신선한 100% 천연주스를 5만 리알(약 1500원)에 맛볼 수 있었다. 이란인들은 아랍인이라고 잘못 불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8200만 인구의 51%가 페르시아인, 24%가 아제르바이잔인이고 인도·유럽계 언어인 페르시아어가 공용어다. 미디어 리서치업체 NNC의 무함마드 네아마차데 대표는 “이란이라는 국명부터 ‘아리아인의 땅(Land of Aryans)’에서 나온 것”이라며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권과는 인종·언어·문화가 완전히 다르다”고 강조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추산한 올해 이란의 국내총생산(GDP)은 4100억 달러, 1인당 GDP는 5000달러 수준이다.

이 같은 이란의 잠재력은 한국 기업에도 매력적이다. 청와대는 지난 5월 박근혜 대통령의 이란 방문을 계기로 한국 기업들이 최대 456억 달러(약 54조원)에 달하는 이란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을 수주했다고 발표했다. 쌍용자동차는 올해 이란에 8000대의 티볼리 차량을 판매할 전망이다. 최종식 쌍용차 대표는 “지난해 10월 이란 마슈하드 모터쇼에서 선보인 티볼리는 당시 1만 대 계약을 확보하며 눈길을 끌었다”며 “경제제재가 풀리면서 유럽과 일본 업체들이 재진출하고 있는 이란 시장을 발 빠르게 선점해 중동 및 중앙아시아·북아프리카 시장 공략의 교두보로 삼을 것”이라고 말했다. LG전자는 화학·이노텍과 함께 이란에서 전기차를 생산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하지만 MOU를 맺은 지 7개월이 지나도록 최대 규모인 대림산업의 이스파한~아와즈 철도사업(53억 달러)을 비롯해 현대건설의 차바하~자헤단 철도공사(17억 달러), 대우건설의 테헤란~쇼말 고속도로(10억 달러) 등 대부분의 사업이 본계약을 체결하지 못하고 있다. 포스코가 이란 철강회사인 PKP와 손잡고 차바하 경제자유구역에 짓기로 한 연산 160만t 규모의 일관제철소 역시 지연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정부의 경제외교 실적을 부풀리기 위한 과장 발표가 아니었느냐는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MOU를 확정 계약처럼 발표한 것은 문제가 있지만 이란 시장 진출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SOC 사업이 지지부진한 것은 미국의 금융제재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승호 주이란 한국대사는 “미국·이란 양국은 올 초 맺은 JCPOA를 모두 이행했지만 금융제재 문제가 이 합의안에 빠져 있던 것이 갈등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이란은 미국의 금융제재가 계속되더라도 유로화나 엔화로 거래가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지만 달러화 거래가 막혀 있는 한 유럽·일본 은행들도 이란과의 거래를 꺼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설계·조달·시공(EPC)+파이낸싱’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란 SOC 투자가 벽에 부딪혔다. EPC 파이낸싱은 시공사가 대출이나 보증 등을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공사를 끝내고 발주처로부터 이자를 포함한 공사비를 되돌려 받는 방식이다. 외부 자금 조달이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수출입은행이 이란 정부의 지급 보증을 토대로 시공사에 자금을 지원하고 한국무역보험공사가 보증을 서야 한다. 대림산업 관계자는 “이처럼 복잡한 조건 탓에 모두가 만족할 만한 협상안을 만들기도 어려운 데다 외부 변수까지 너무 많아 진전이 더디다”고 설명했다.

[“대형 프로젝트 협상 과정 해 넘기기 일쑤”]
이란의 금융제도와 불투명한 법체계도 문제다. 현지 진출을 준비하고 있는 한 업체 관계자는 “미국과의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아 달러 결제는 물론 신용장 개설도 불가능하다”며 “수출입은행 등의 지원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KOTRA 관계자는 “해외 투자 유치를 장려한다지만 투자 관련법의 영문판조차 갖추지 못한 경우도 있고, 투자 관련 법령은 갖췄지만 과실송금 관련 법은 아직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현행 법과 샤리아(이슬람 율법)가 충돌할 경우 판정을 이슬람 성직자가 맡는 것도 외국 기업이 투자를 망설이는 이유”라고 지적했다.


상황이 비관적이지만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건설업체 관계자는 “대형 프로젝트의 경우 협상 과정이 해를 넘기기 일쑤인 이란의 거래 관행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며 “최근 유가 상승도 이란이 진행 중인 한국식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투자증권은 앞으로 3년간 연평균 1조~3조원의 선박과 35조원의 플랜트 발주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이경자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미 의회가 이란제재법을 연장했지만 2010년과 같은 초강력 제재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자금 조달방안만 마련할 수 있다면 한국의 조선·건설산업에 호재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수혜 종목으로 현대중공업과 대림산업을 꼽았다.


서정민 한국외대 중동아프리카학과 교수는 “이란은 동남부 자유무역지대인 차바하를 항구로 개발하고 러시아와 동유럽으로 이어지는 철도망을 연결하려는 장기 계획을 갖고 있다”며 “이 프로젝트가 성공할 경우 페르시아만에서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하는 원유 수송라인과 홍해를 거쳐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아시아~유럽 물류망이 근본적인 변화를 맞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테헤란·이스파한·시라즈=김창우 기자changwoo.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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