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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첫 피해자 ‘할리우드 10’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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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호 28면

문화·예술단체들이 청와대·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를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고발했다. 현 정부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문화·예술계 인사 9473명이 포함된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는 의혹 때문이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1947~60년 미국에서도 존재했다. 부끄러운 반면교사다. 발단은 주간 ‘할리우드 리포터’의 창업자·발행인 빌리 윌커슨(1890~1962)이 1946년 7월 29일자에 쓴 ‘스탈린에게 한 표를’이라는 칼럼이었다. 그는 “할리우드에 공산당 동조자가 있다”며 시나리오 작가, 감독 등 10여 명의 실명을 거론했다. 가십 수준이던 이 사건은 1947년 3월 해리 트루먼 당시 대통령이 대통령령 제9835호로 ‘연방 피고용인 충성 프로그램’을 가동해 비미국적인 요소·인물을 배제토록 하면서 주목받았다. 하원의 비미국활동위원회와 상원의 조지프 매카시 위원회는 ‘미국인 공산당과 그들의 스파이 활동과 선전’ 등을 조사한다며 민간인을 핍박했다. 하원 비미국활동위원회가 10명의 할리우드 인사를 증인으로 소환했지만 이들은 양심의 자유를 규정한 헌법에 어긋난다며 거부했다.


1947년 11월 24일 미 하원은 346 대 17의 표결로 이들이 의회를 모욕했다고 비난했다. 다음날 영화제작자협회(MPAA) 소속의 스튜디오 제작자, 즉 영화사 사장들은 뉴욕의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에 모여 10명을 모두 해고하고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밝히거나 혐의가 벗겨질 때까지 재고용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이른바 월도프 선언이다. 의회와 영화사들이 공산주의에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파시스트적인 일을 벌였다. 블랙리스트 첫 피해자인 이들은 ‘할리우드 10’으로 불린다. 이는 시작이었을 뿐이다. 1950년 6월22일 나온 ‘레드 채널’이라는 팸플릿에는 ‘붉은 파시스트와 그들의 동조자’라는 제목으로 151명의 방송계 인사가 실렸다. 이들 대부분은 이후 연예산업 부문에서 어떤 일자리도 구할 수 없었다.


할리우드 10의 대표 인물이 시니리오 작가 돌턴 트럼보(1905~1976)다. 그는 ‘로마의 휴일’(1953), ‘용감한 사람’(1956), ‘스파르타쿠스’(1960), ‘엑소더스’(1960), ‘파피용’(1973) 등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썼다. 오드리 햅번(1929~1993)과 그레고리 펙(1916~2003)이 주연한 로맨틱 코미디의 원조 ‘로마의 휴일’은 최우수여자배우상·각본상·의상상 등 3개 부분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당시 각본상은 공동 작가인 존 다이턴과 함께 트럼보 대신 이름을 올린 이언 헌터가 탔다.


1993년 아카데미위원회는 오스카상을 새로 만들어 트럼보에게 추서했다. 2003년 DVD로 출시될 때 화면에 트럼보의 이름이 비로소 들어갔다. ‘용감한 사람’의 아카데미 최우수원작상(1957년을 마지막으로 폐지)은 로버트 리치라는 가명으로 받았는데 1976년 트럼보로 수정됐다.


영화의 역사는 1960년 ‘스파르타쿠스’와 ‘엑소더스’ 개봉 당시 트럼보의 이름을 공개한 일을 블랙리스트의 공식 폐지로 본다. 당시 대통령 당선인 존 F 케네디의 지지도 한몫했다. 미국은 1989년부터 문화적·역사적·예술적 가치가 높은 영화를 선정해 의회도서관에서 영구보존하는 국립영화등록 제도를 운영하는데 1999년 ‘로마의 휴일’을 채택했다.


야만의 산물인 블랙리스트에 대한 미국의 반성과 사과인 셈이다. 민주주의는 부끄러운 역사를 반성하면서 자란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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