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응변의 눈가림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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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박종철군 고문치사범 은폐, 조작사건에 대한 국민적 충격과 분노는 어느때 없이 크고 깊다.
검찰은 24일 현장 검증에 이어 은폐, 조작의 혐의를 받고 있는 검찰 간부들에 대한 수사를 4일째 계속했다. 그러나 고문치사의 현장 검증이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성의를 다하기 보다 하나의 요식행위로서 진행되고 있는 인상이다. 더우기 이번 수사를 맡은 검찰수사팀이 지난번 수사를 맡았던 동일팀이라는 점에서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수사의 진행상황이나 공정성 여부 못지않게 우리의 관심은 사태에 대한 정치적 인책에 쏠리고 있다. 사건의 중대성이나 심각성에 비추어 하위관련자 몇명의 추가 문책만으로 사태수습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태수습을 위해 정치적 차원의 문책 개각이 단행된 것은 그나마 사태수습의 실마리가 되었으면 한다. 불과 보름 앞으로 다가온 민정당의 전당대회를 순조롭게 치러지기 위해서는 내각이 심기일전의 새모습을 보여야함은 누구보다 집권당 자신을 위해 필요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의 하나는 그때 그때 곤경과 위기만을 넘기면 그만이라는 풍토의 팽배라고할수 있다. 시속 말대로 내일은 삼수갑산을 갈망정 눈앞의 곤경만 넘기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물쩍 잊혀지고 흐지부지 되겠지 하는 안역한 생각말이다. 따지고 보면 이같은 안이한 처신이 실제로 먹혀들지 않았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박군 사건의 은폐, 조작의 전모를 끝내 밝혀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런 임기응변식의 눈가림이 성행해서는 나라의 정상적 운영은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사태를 진정시킬수 있는 방법은 크게 보아 두가지다. 첫째는 내각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개각되었다고 해서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전면」이냐, 「부분」 이냐도 부차적인 의미밖에는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민심을 수습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와함께 사건수사도 누가보아도 납득할수 있는 방향에서 원점에서부터 재점검되어야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건 당사자인 경찰에 의한 수사는 이제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곧이 들을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검찰 역시 팀을 바꾼다해도 신뢰성을 잃은 것은 대동소한하다.
그렇다면 사건수사는 공정성과 신뢰성을 확보할수 있는 제3의 기관이 나서는 수밖에는 없다. 이미 지적한대로 그런 기관이나 단체는 국회와 변협뿐이다.
여야의 가파른 대치상황에 비추어 국회가 진상을 파헤치는데 얼마만큼의 기여를 할지는 의문이 앞선다. 하지만 여야가 구차스러운 당리당락을 떠나 행정부를 견제·감시하는 본래의 기능을 살릴 생각이라면 국정조사권의 발동에 주저해야할 이유는 없으리라고 본다.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헤아린다면, 그리고 은폐, 조작의 악순환이 고스란히 집권당의 부담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눈앞의 곤경만 벗어나기 위해 사건을 호도할 궁리만 하고 있을때는 아닌것이다.
뒤늦게나마 국회도 임시회의라도 소집해서 국민의 요청에 보답하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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