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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무력부장傳(6)] 19년 집권, 최장수 인민무력부장 오진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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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인민무력부장은 오진우(1917~1995)다. 1976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19년 동안 인민무력부장을 맡았다. 1948년 조선인민군 창건 이래 최장수다. 재임 기간으로 따지면 2위인 김일철 제7대 인민무력부장(11년)보다 8년을 더했다.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있는 오진우 반신상[사진 중앙포토]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있는 오진우 반신상[사진 중앙포토]

깡마른 얼굴에 호전적인 생김새와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1976년), 아웅산 테러(1983년) 등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돼 한국인들에게 깊이 각인돼 한국 사람들에게 북한 인민무력부장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게 하는 인물이 오진우다.

오진우는 조선인민군 창건 이래 가장 화려한 군경력을 가졌다. 조선인민군 원수,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총정치국장, 총참모장 등을 역임해 김일성·김정일 다음 가는 넘버3다. 노동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이후 사망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016년 5월 노동당 제7차 대회에서 개회사를 읽으면서 항일혁명투사들 가운데 김일, 최현, 오백룡, 오진우, 최광, 임춘추, 박성철, 전문섭, 이을설 등 9명을 거명했다. 수많은 항일혁명투사 가운데 이들을 언급한 기준은 알 수 없지만 인민무력부장 가운데 최현, 오진우 그리고 최광이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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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복이 많아서 그런지 오진우는 인민무력부장에 임명된 지 3개월 만에 8.18 도끼만행 사건을 처리해야 했다. 1976년 8월 18일 오전 11시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사천교 근방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유엔사 경비병들을 북한군 수십 명이 도끼 및 흉기로 구타, 살해한 사건이다.

미국은 사건 다음날인 19일 북한군의 행위를 비난하며 휴전 후 처음으로 전쟁준비 태세인 데프콘2를 발령하고 미드웨이 항모전단, F-111 전폭기 20대, B-52 폭격기 3대 등을 한반도에 배치했다. 여차하면 북한을 초토화하겠다는 의지였다. 북한도 이에 질세라 전 군대와 노동적위대 등 북한의 모든 정규군과 예비군 병력을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한미 연합군이 사건 발생 사흘 뒤인 8월 21일 북한에 사전 경고한 다음 문제의 미루나무를 절단하면서 끝났다. 미국은 당시 대선이 한창인데다 베트남 전쟁이 막 끝난 시점에서 한반도에서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은 책임 주체가 명시되지 않은 김일성의 유감 표명을 받아내고 이 사건을 서둘러 수습했다.

오진우는 돌발사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1968년에 발생한 푸에블로호 사건 이후 8년 만에 발생한 미국과의 대치상황에 겁부터 났던 것이다. 미군이 막강한 화력을 한반도에 배치해 놓고 미루나무를 자르겠다고 경고하자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미군이 확전을 하려고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상황이었다. 위기를 넘긴 오진우는 절치부심했다. 하지만 더 급한 일이 생겼다. 김정일의 군에 대한 지도권 확립을 돕는 것이었다. 후계자가 된 김정일이 노동당을 장악한 뒤 군대를 장악하려는 시기였다. 하지만 군대가 노동당보다 쉽지 않았다.

김일성(사진 왼쪽)이 1985년 8월 만경대 야외수영장을 김정일과 오진우(사진 맨 오른쪽)와 함께 방문했다. [사진 중앙포토]

김일성(사진 왼쪽)이 1985년 8월 만경대 야외수영장을 김정일과 오진우(사진 맨 오른쪽)와 함께 방문했다. [사진 중앙포토]

오진우는 1970년대까지 김정일보다 김일성 사람이었다. 군대내에서 김정일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혁명 2세대들로 오극렬, 김두남, 김강환, 최상욱 정도였다. 나중에 이들은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의 최측근이 된다. 하지만 김일성 사람이었던 오진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정일을 ‘당중앙’으로 호명하던 시기에 당중앙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등 그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김정일이 노동당을 장악하여 돌풍을 일으키면서 자행되는 ‘독주’ 혹은 ‘전횡’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오진우가 ‘김정일의 남자’로 되는 시점은 1977년 11월이다. 김일성이 군대 장악에 어려워하는 김정일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인민군 제7회 선동원 대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인민군 10대 준수사항’을 제시하면서 군대에서 김정일의 유일지도체제 구축을 위해 그의 결정을 철저히 준수할 것을 지시했다.

이 연설이 있은 이후 1978년 인민군 창건일이 2월 8일에서 4월 25일로 변경됐고, 그 이듬해인 1979년부터 김정일의 군에 대한 적극적인 역할이 재개됐다. 4월 25일은 김일성이 1932년 만주 안도현에서 항일유격대를 창건한 날짜다. 김정일은 조선인민군이 항일혁명전통을 계승한 군대임을 강조함으로써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했던 군 수뇌부들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다.

김정일(사진 왼쪽)이 1984년 인민무력부 관계자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김정일의 오른쪽에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연형묵 비서가 보인다. [사진 중앙포토]

김정일(사진 왼쪽)이 1984년 인민무력부 관계자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김정일의 오른쪽에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연형묵 비서가 보인다. [사진 중앙포토]

오진우는 김정일을 후계자로 키우려는 김일성의 마음을 읽은 뒤 김정일에 대한 소극적인 자세에서 적극적으로 돌아섰다. 그 이후 오진우는 사망할 때까지 최현의 뒤를 이어 김정일이 후계자로 안착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노동신문은 1995년 2월 26일자 1면에 오진우의 부고를 실으면서 “김정일 동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했다”고 기록했다.

이는 인민무력부장 가운데 1면에 부고가 실리는 두 번째 사례다. 첫 번째는 최용건 제1대 인민무력부장이다. 제2대 김광협, 제3대 김창봉 등은 정치적 숙청으로 언제 사망했는지 알려지지 않았고 제4대 최현은 노동신문 2면에 실렸다. 최용건·오진우가 1면에 실린 것은 조선인민군의 창건과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남달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북한이 2009년 오진우(사진 가운데)의 말년을 소재로 한 예술영화 `백옥`의 한 장면. [사진 조선중앙TV 캡처]

북한이 2009년 오진우(사진 가운데)의 말년을 소재로 한 예술영화 `백옥`의 한 장면. [사진 조선중앙TV 캡처]

 북한은 2009년 오진우의 말년을 소재로 한 2부작 예술영화 ‘백옥’을 제작해 그를 기념하는 날을 즈음에 방영했다. 오진우를 ‘백옥’에 비유한 것은 그의 삶이 당과 수령을 변함없이 순결하게 끝까지 받들었다는 의미에서다. 그의 아들은 오일정 전 노동당 민방위 부장이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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