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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리포트] “대통령=부패 선입견 생겨” “비폭력 촛불집회 경이로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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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외국인 유학생이 본 최순실 스캔들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박근혜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이자 국군통수권자로서의 권한이 정지됐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지만 정치 지도자의 탄핵은 해외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정치적 행위다. 국가 지도자가 뇌물 수수, 국가기밀 유출, 불법 도청, 무능 등 다양한 이유로 국민의 반발을 사 탄핵당하거나 자진 하야하는 등 불명예 퇴진한다.

한국에 유학 온 외국인 유학생들이 국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가결 하루 전인 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였다. 이들은 촛불집회에 대해 “경이롭다”고 입을 모았다. 왼쪽부터 앤드루 토머스(미국), 리비아 멜루(브라질), 로라 쿨리그(독일), 마크 홉킨스(호주). [사진 우상조 기자]

한국에 유학 온 외국인 유학생들이 국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가결 하루 전인 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였다. 이들은 촛불집회에 대해 “경이롭다”고 입을 모았다. 왼쪽부터 앤드루 토머스(미국), 리비아 멜루(브라질), 로라 쿨리그(독일), 마크 홉킨스(호주). [사진 우상조 기자]

중앙일보 청춘리포트팀은 한국에 체류하는 독일·미국·브라질·중국·호주 유학생을 만났다. 모국(母國)에서 자라며 보고 느낀 경험을 바탕으로 최근 한국 상황에 대한 의견을 듣기 위해서였다.

261만원 와인 받은 호주 주 총리도
특혜 대출 받은 독일 대통령도 사임
한국은 비리 드러나도 안 물러나
여성 지도자 기대·애정 남다른데
메르켈과 박 대통령 처지 대조적
지도자는 국민 평균모습 대변해야

◆“최순실 국정 농단은 한국 특유의 부패”

‘상상할 수 없는(unimaginable)’ ‘비민주적인(undemocratic)’.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부터 박 대통령 탄핵까지 일련의 사태에 대한 소감을 묻자 튀어나온 형용사다. 미국 북애리조나대의 앤드루 토머스(21·고려대 교환학생)는 “최근에 한국 정치 관련 강의를 들었는데, 과거 한국 대통령들이 퇴임 후 부정부패 혐의로 수사를 받은 경우가 적잖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런데 현직인 박 대통령까지 탄핵당하는 걸 보면서 ‘한국 대통령=부정부패’라는 선입견이 생겼다”고 말했다.

호주 시드니대에서 온 마크 홉킨스(22·고려대 교환학생)는 “청와대의 압력을 받아 삼성·현대차 등 굴지의 대기업이 (미르·K스포츠재단 등) 재단법인에 자금을 투입했다는 사실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이 가까워지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례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사이비 종교가 거론되고, (정유라의) 대학입시 비리까지 불거지는 상황이 괴상하게(bizarre) 느껴졌다”고 덧붙였다.

‘유리 천장’을 뚫은 여성 지도자로서의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한 데 대한 안타까움도 얘기했다. 독일의 로라 쿨리그(27·한양대 석사과정)는 “독일에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있듯이 한국엔 박 대통령이 있다고 생각했다. 같은 여성으로서 두 여성 지도자에 대한 기대와 애정이 남달랐다. 그런데 정치인과 국민의 신망 속에 4선 연임에 도전하고 있는 메르켈과 박 대통령의 처지가 너무 대조적이다”고 말했다.

최씨의 국정 농단 사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뒤에도 검찰 수사를 피하고 퇴진 의사도 명확히 밝히지 않는 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쿨리그는 “2012년 독일의 크리스티안 불프 대통령은 사업가 친구에게서 저금리로 돈을 빌렸다는 사실이 언론에 폭로돼 검찰 수사 하루 만에 사임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구체적인 비리 정황이 드러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호주 출신의 홉킨스도 “2014년 호주의 한 주(州)총리는 3000호주달러(약 261만원)짜리 포도주를 받았다는 이유로 사임했다. 한국 정치인은 도덕 수준이 그리 높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고 맞장구쳤다.

◆“한국 일부 정치인 대중과 괴리감”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다음 날인 1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 [사진 김성룡 기자]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다음 날인 1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 [사진 김성룡 기자]

외국 학생들에게 바람직한 ‘정치 지도자’란 어떤 모습일까. 쿨리그는 “대통령·총리·국회의원과 같은 정치인은 국민의 평균적인 모습을 대변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일부 정치인은 부패한 데다 재산까지 많은 듯한 인상이 든다. 분명 대중과 괴리감이 있다”고 말했다.

대중에게 친근히 다가가기 위해선 정치인으로서 진심 어린 모습이 필요하다는 주문도 있었다. 토머스는 미국 민주당 지지자였던 부모님의 경험을 얘기했다.

“부모님은 1998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성추문에 휘말리고 위증까지 하는 모습에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그가 추후 구체적으로 해명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에 마음이 조금씩 풀렸다. 박 대통령은 그러지 못했던 게 아쉽다. 세 차례 대국민 담화를 했지만 질의응답도 없이 변명으로 일관했던 게 시민들의 저항을 더 키운 것 같다.”

◆“경찰에 꽃 던져주던 시민들 인상적”

박 대통령이 탄핵된 건 최씨의 국정 농단 의혹이 불거진 지 약 두 달 만이다. 누적 인원 750만 명이 참여한 주말 촛불집회가 사실상 박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었다. 외국인학생들은 촛불집회에 대해 “경이롭다”고 평가했다. 브라질 출신의 리비아 멜루(24·경희대 경영학 3)는 “브라질에선 최근 회계부정 혐의로 탄핵된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을 두고 시민들이 두 파로 나뉘어 무력 충돌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시민들이 질서정연하게 시위에 참여하면서 한목소리로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온 요가옥(21·건국대 국제무역학 2)은 “중국은 선거가 치러지지 않아 정치인을 내 손으로 뽑을 수 없다. 또 정부에 불만이 있어도 이에 대한 시위 허가를 받는 과정이 매우 까다롭다. 그래서 한국의 촛불집회가 직접 뽑은 국가 원수의 탄핵을 이끌었다는 점이 신기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지난 10월 29일 종로와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첫 주말 촛불집회 때는 시위 진압을 책임진 홍완선 종로경찰서장이 “나라를 사랑하는 여러분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이에 대해 토머스는 “미국에선 시위대와 대립하던 경찰이 최루탄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며 “한국은 시민이 경찰에 꽃을 던져 주는 등 서로 입장을 이해하려는 모습이 마음에 와 닿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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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들이 본 한국의 희망도 촛불에 있었다. 최씨 국정 농단이 드러난 직후부터 탄핵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모습을 홉킨스는 이렇게 정리했다.

“‘최순실 게이트’는 잠복해 있던 온갖 비리가 한꺼번에 터진 한국의 독특한 사례로 보였다. 하지만 시민들이 평화적인 촛불집회를 주도하고 현직 대통령의 탄핵까지 이끌어낸 것도 한국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에 희망이 느껴진다.”

글=조진형 기자 enish@joongang.co.kr
사진=우상조·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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