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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효천학원 향토문화개발 심포지엄|전라좌수군의 주력 이루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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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순천을 포함해 전남동부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는 향토문화개발심포지엄이 2일 학교법인 효천학원(이사장 서채원) 주최로 순천효천고등학교 강당에서 열렸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최성락교수 (목포대)의 「전남지역선사문화의 특성, 조원래교수 (순천대)의 「임란해전에서 본 호남연해민의 활동」, 이을호씨 (국립광주박물관장)의「강?유배시의 정다산」, 강길원교수 (전북대)의 「한말 전라동부지역의 의병활동」 등의 주제발표가 있고 이어 토론이 전개됐다.
토론에는 김동수 (전남대) 박병왕 (여수수산대) 송정현 (전남대) 박동원 (광주교대) 등 지역학자들과 최영희 (한림대) 김정기 (한림대) 임병태 (숭실대) 김경태 (이대) 등이 참가했다. 지방의 학술심포지엄으로서는 처음 전국적인 규모를 보인 이번 심포지엄에는 또 이진희 (일본 명치대) 강재? (일본 화원대) 강덕상 (일본 명치대) 등 재일학자들도 참석하여 주목을 끌었다.
심포지엄 중에서 조원래교수의 「임란해전에서 본 호남연해민의 활동」은 토론과정에서 다양한 의견이 나와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조씨는 발표에서 지금까지의 임란해전에 대한 연구가 주로 이순신장군의 전략전술과 전과에 한정되어 왔다고 지적하고 임란에서의 충무공의 전공과 구국정신에 대한 평가는 물론 중요하지만 이와 함께 수군의 실전주체인 연해지역 하층민에 대한 관심도 커져야한다고 주장했다.
실전을 수행한 수군장졸들의 역전과 희생, 전화와 징발의 고통속에 어려움을 겪은 연해지역주민들의 모습이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충무공의 전공과 거북선의 위력만 설명되어서는 무의미하다는 것.
조씨는 임란의 수전을 승리로 이끈 주력을 전라좌수군으로 보고 좌수군의 주력이 현재의 여수를 중심한 지역의 하층민에서 나왔다고 보았다. 조씨는 이 지역이 천험의 해방요새를 이룬데다가 이 지역에서 임란전에 대소의 왜군과의 접전이 있어 수군들이 실전을 경험하여 정예화되어 있었고 이들의 잠재력이 충무공의 뛰어난 지휘에 의해 드러나 승리를 이루었다고 밝혔다.
조씨는 좌수군을 이룬 병력은 토병·세전수군 등 이 지역 토착하층민들이었다고 강조했다. 이중 토병은 용병적 성격을 지닌 기능병이었으며 그들이 노꾼과 사격수의 핵심을 이루었다고 보았다.
또 정규수군이 아니면서 좌수군의 중요한 몫을 담당한 층으로 하층민이 중심이 된 의병과 의승군의 활동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순천·흥양지역을 중심으로 기병한 이들 의병들은 직접 해전에 참전하기도 하고 진지방어의 역할도 담당했다는 것이다.
이들 실전에 참여한 하층민들과 함께 연안지역 후방주민들의 전비를 위한 희생도 강조됐다.
조씨는 앞으로 이들 연해하층민들의 전쟁수행역할·희생 등이 더 연구되어야 임란수전승리의 실상이 밝혀질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에 대해 송정현교수 (전남대)는 조교수가 임란수군을 너무 좌수군에 한정해 보았으며 수전에 참가한 의병을 가정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송교수는 『육전과는 달리 수전에서는 단순한 의병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고 『수전에 자진하여 참여한 민간인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엄격한 훈련을 거쳐 정규수군으로 모습을 바꾸어 해전에 참가했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영희교수는 『하층민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은 임란연구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기록의 부족으로 남해안 전체연해주민의 활동상이 세밀히 밝혀지지 못하고 있음을 아쉬워했다.
한편 강길원교수는 『한말 전라동부지역의 의병활동』에서 이 지역이 의병활동이 가장 적극적으로 전개된 곳이라고 발표했다. 강교수는 1908년 후반기 전국의 의병전투횟수는 1천9백76회였는데 전남이 2백74회로 13·9%였고 1909년 전반기 의병전투횟수로는 전남이 5백47회로 31·5%를 차지했으며 투쟁에 참여한 의병수로는 45·6%인 5천5백76명이 기록되고 있다고 말했다.
의병활동이 전남에서 크게 일어난 것은 일본인들의 토지수탈이 이 지역에서 혹심했던데서 찾았다.

<순천=임재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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