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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김정은, 통전부 30년간 못한 일 최순실이 해냈다 생각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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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다루는 북한 관영매체의 입이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어제 아침 평양에서 발간된 노동신문은 ‘남조선’ 코너 한 개면 전체를 관련 선동 글로 채웠는데요. 지난 3일 서울에서 열린 6차 촛불 집회를 머릿기사에 올린 지면 곳곳에는 ‘박근혜 패당’ ‘박정희 족속’ ‘역적 무리’ 등의 표현은 물론 욕지거리 수준의 막말까지 등장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저열한 단어가 버젓이 노동당 기관지에 실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입에담기 힘든 극렬한 비방을 그대로 쏟아내는 조선중앙TV 아나운서의 멘트는 귀를 의심케합니다. 대남 선전용 웹사이트인 ‘메아리’는 최순실 사태 초점 페이지를 만들어 ‘박근혜의 교활한 술책은 통하지 않는다’는 등의 글을 무더기로 올려놓기도했죠.

11월 29일자

11월 29일자

북한의 이런 움직임은 지난 10월29일 1차 촛불집회를 계기로 본격화했는데요. 관영매체를 총동원한 선동보도는 첫째로 박근혜 정부의 퇴진과 남한 정국의 혼란조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둘째로는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 내 혼란과 부패상을 부각시켜 김정은에 대한 충성과 이른바 ‘체제 우월성’을 갖도록 유도하는 문구들이 눈에 띕니다. 셋째는 박근혜 정부가 그동안 추진해온 대북정책의 부당성을 주장해 노선변화를 이끌려는 의도가 드러납니다. 넷째는 북한으로서는 껄끄러운 존재인 남한 내 보수세력을 이참에 완전히 몰락·퇴출시켜버리겠다는 뜻도 감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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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건 북한 스스로 ‘북풍(北風)’ 운운하고 나선다는 겁니다. 북한은 2일 민족화해협의회 명의의 담화에서 “박근혜 패거리들은 날로 고조되는 전민(全民)항쟁이 ‘북의 조종’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여론화해보려고 획책하고 있다”고 주장했죠. 최근 활발해진 대남 난수(亂數)방송이나 북핵 위협론까지 거론하며 셀프 북풍 차단에 나선 겁니다. 최순실 사태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겠다는 북한 당국의 뜻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대목인듯 합니다.

‘촛불시위 대서특필’ 북한매체 의도
정국 혼란, 보수세력 축출 등 주목
김정은, 수시 보고 받고 실시간 체크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작금의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집무실과 관저의 위성TV나 인터넷망으로 실시간 체크하는건 물론이고, 당 통일전선부의 ‘남조선 정세보고’를 통해 수시로 추이를 살펴볼 것이란 게 정보당국의 판단입니다. 대남부문에 관여했던 탈북인사는 “김정은이 ‘통전부가 30년 넘도록 해내지 못한 일을 최순실이 해냈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진단합니다. 집요한 대남 공작에도 성과가 없던 남한 정국 혼란이나 보수세력 축출 국면을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실세가 스스로 만들어줬다는 건데요. 며칠 전 포병부대 훈련을 참관한 김정은이 “남조선 것들을 쓸어버리라”고 호언한 것도 결국 우리가 북한에게 얕잡힌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씁쓸해집니다.

11월 30일자

11월 30일자

하지만 북한도 마냥 촛불을 즐길 수 만은 없는 상황인 듯 합니다. 집회와 시위 장면을 전하는 북한 매체의 영상에서는 평양 집권층의 심각한 고민이 엿보이는데요. 남한 TV 화면이나 신문 사진을 무단전재하면서도 유독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찍은 사진만을 선호하는 게 눈길을 끕니다. 화질도 떨어트려 다소 조잡하게 만들죠. 노동당 간부 출신의 탈북인사는 “북한 주민들에게 서울의 고층빌딩 숲이나 차량정체를 또렷하게 보여주는 건 치명적인 역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귀띔합니다. 군중의 모습과 플래카드만 보일 정도만 남기고 주변을 모두 잘라내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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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주민들 사이에 “남조선에는 최고지도자도 몰아낼 자유가 있구나”하는 생각이 꿈틀거린다면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죠. 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해 이집트와 알제리 등을 휩쓴 민주화 물결인 ‘재스민 혁명 ’과 달리 서울발 촛불혁명은 코앞에 닥친 일입니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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