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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무력부장傳(4)] 최현, 숨겨진 김정일 킹메이커(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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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님(김일성), 김정일 동지를 후계자로 삼아야 합니다.”

이 말이 북한의 역사를 바꾸게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이 말을 굳이 비교하자면 귄터 샤보프스키 동독 선전담당 비서가 ‘지체없이 지금부터’라는 한 마디로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의 주인공은 최현(1907~1982) 인민무력부장이다. 지금 최용해 국무위원회 부위원장의 아버지다. 북한은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하고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 회의를 열어 민족보위성을 인민무력부로 개칭했다. 따라서 최현은 1969년 1월 제4대 민족보위상에 올랐다가 1972년부터 개칭된 인민무력부장을 맡았다.

최현은 1960년 후반 김일성 후계자 문제를 놓고 치열한 권력싸움을 벌일 때 끝까지 김정일을 옹립했다. 당시 분위기는 김일성과 둘째부인 김성애 사이에 태어난 김평일에 쏠려 있었다. 김일성도 김성애의 입김 탓에 누구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최현은 권총을 들고 다니면서 김평일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협박했다. 하지만 더 중요했던 것은 김일성의 귀에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당시 절대권력을 쥔 김일성의 마음을 돌리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다들 김일성의 눈치를 보던 시절에 최현이 나선 것이다. 최현은 김일성과 사적으로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김일성과 독대를 통해 이 글의 서두에 했던 말을 했던 것이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의 첫 장에 실린 사진. 사진 왼쪽부터 최현, 김일성이다. [사진 중앙포토]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의 첫 장에 실린 사진. 사진 왼쪽부터 최현, 김일성이다. [사진 중앙포토]

 김일성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현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이었다.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의 첫 장에 최현과 찍은 사진을 게재했고, 4권에는 ‘백전노장 최현’이라는 제목으로 35페이지를 할애해 그를 추억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두 사람은 1933년 9월 중국 왕청현 소왕청 마촌에서 처음 만났다. 둘 다 모두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장 왕더타이(王德泰) 밑에 있을 때였다. 『세기와 더불어』 4권에는 최현이 비록 5살 위였지만 처음 만났을 때 ‘김일성 대장님’이라고 불렀다고 적혀 있다. 초면이라 그럴 수 있고, 김일성 우상화에 따라 조작했을 수도 있다.

최현(사진 중앙)이 항일혁명시기에 만주에서 김일성(사진 왼쪽)과 안길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사진 중앙포토]

최현(사진 중앙)이 항일혁명시기에 만주에서 김일성(사진 왼쪽), 안길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사진 중앙포토]

이렇게 만난 두 사람은 서로 깊은 전우애를 나누었고 최현은 ‘김일성의 남자’가 됐다.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최현에 대해 서술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최현은 매우 솔직하고 소탈한 사람이다. 그는 보는대로 말하고 생각나는대로 표현하는 사나이다.”

“최현은 일평생 비관을 모르고 살아온 낙천가였으며 어떤 폭풍속에서도 앞으로만 돌진해온 탱크 같은 사나이였다.”

평양 혁명열사릉에 있는 최현의 반신상[사진 중앙포토]

평양 혁명열사릉에 있는 최현의 반신상[사진 중앙포토]

최현은 김일성의 최대 위기였던 1956년 8월 종파사건때 김일성을 결사옹위했다. 이 사건 이후 김일성은 최현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으로 그를 ‘충신’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최현 집안을 ‘충신 집안’으로 불리는 이유가 이 때부터다. 이런 깊은 관계로 최현은 1972년 김일성에 독대를 신청해 김정일의 실력을 하나 둘씩 열거했다.

김정일은 1967년 노동당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 박금철, 이효순 등 갑산파를 숙청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 회의를 계기로 조선노동당 내에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유일사상체계를 구축하는데 중심이 됐다고 그를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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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당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장으로 문화예술 부문을 지도해 ‘백두산 창작단’, ‘피바다 가극단’, ‘만수대 창작사’ 등을 창설해 북한 문화예술계의 돌풍을 일으켜 1970년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승진한 점도 내세웠다. 김일성 역시 이런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70년 11월에 열린 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으로 세워야 한다는 원로들의 주장을 일단 보류시켰다. 김일성은 본인의 둘째 부인 김성애를 삐딱하게 대하는 김정일이 거슬렸다.

최현(사진 오른쪽)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혁명가`의 한 장면. [사진 조선중앙TV 캡처]

1984년 발표된 북한 영화 `혁명가`의 한 장면, 최현(사진 오른쪽)을 주인공으로 했다. [사진 조선중앙TV 캡처]

 하지만 최현의 완강한 설득과 충정어린 고견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후계자로 김정일을 결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정일이 최현에 대한 고마움은 어땠을까? 은인이자 평생 보답해야 할 사람이었을 것이다. 김정일은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혁명가’라는 영화를 만들어 전국에 보급했다. 그에 감사하는 마음은 최현의 아들 최용해로 이어졌고, 김정일 사망 이후는 김정은이 아버지의 마음을 이어받아 최용해를 곁에 두고 있다. 최용해는 현재 당 서열 5위이며 장성택이 사망한 이후 김정은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계속).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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