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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 칼럼

언론과 검찰의 컬래버레이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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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배명복
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앞을 내다보기 힘든 세상이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인 브렉시트(Brexit)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까지 설마 했던 일들이 번번이 현실이 되고 있다. 상식과 통념, 그리고 낡은 방식의 여론조사 수치에 기대어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새삼 깨닫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초대형 게이트
언론이 먼저 의혹 제기하고
검찰이 수사 통해 혐의 확인
언론과 검찰이 각자 영역에서
묵묵히 제 역할 다할 때
권력형 비리 막을 수 있어

사안의 성격은 전혀 다르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몰락도 그렇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가 희대의 국정 농단과 국기 문란 사건의 공모자로 형법상의 피의자가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던가. 오만과 독선, 불통의 상징이었던 박 대통령은 자의든 타의든 자리에서 내려오면 즉시 형사처벌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됐다. 헌정 사상 첫 피의자 대통령이란 불명예 속에 임기를 못 채우고 물러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럼에도 고개를 뻣뻣이 들고 ‘할 테면 해 보라’는 적반하장(賊反荷杖)으로 나오고 있으니 후안무치(厚顔無恥)도 이런 후안무치가 없다. 검찰의 수사 결과가 마음에 안 든다고 수족처럼 부리던 검찰을 공정성과 중립성을 잃은 집단으로 매도하며 국민 앞에 약속했던 검찰 조사마저 거부하고 있으니 시쳇말로 ‘어이 상실’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감탄고토(甘呑苦吐)의 극치다. 자신을 법 위에 군림하는 봉건왕조 시대의 군주로 착각하는 모양이다.

대다수 국민의 마음에서 그는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니다. 국정을 주도할 정치적·도덕적 권위와 권능을 상실했다. 이 상태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하루 빨리 권좌에서 내려와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이 그나마 명예를 지키는 길이다.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궐위로 인한 혼란과 부작용을 염려하는 많은 사람이 미리 사임 의사를 밝히고 2선으로 물러나는 질서 있는 퇴진을 합리적 대안으로 제시했지만 본인이 귀를 막고 있으니 이제 달리 도리가 없다. 헌법에 정해진 대로 탄핵을 통해 강제 퇴진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 검찰이 밝힌 혐의대로라면 탄핵 절차에 들어가야 마땅하다.

브렉시트나 트럼프 당선과 달리 박 대통령의 추락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그런 징후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고, 이를 경고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민심을 거스르는 오만한 권력의 몰락은 역사의 필연이다. 임기가 정해진 대통령제하에서 레임덕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이런 사태가 오기 전에 조심하고 자제했어야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결정적 전환점은 종편방송인 JTBC의 특종보도였다. 지난달 24일, JTBC가 최순실이 사용하던 태블릿PC를 입수해 그 내용을 폭로하면서 사태는 180도 달라졌다. 그 이전에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관한 TV조선의 특종보도와 한겨레와 경향 등 일부 신문의 끈질긴 추적보도가 있었기에 JTBC의 보도가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건 물론이다. 국정 농단의 결정적 물증 앞에서는 박 대통령도 어쩔 수 없었다. 바로 다음 날 국민 앞에 사과했다. 90초짜리 영혼 없는 사과로 오히려 민심에 불을 지른 꼴이 되긴 했지만 말이다.

지금 JTBC 기자들은 ‘한국 언론의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다. JTBC 기자에게는 요금을 받지 않는 택시 운전기사들이 있는가 하면, JTBC 기자에게 음료와 음식을 무료로 제공한다고 밝힌 카페와 식당들이 우후죽순처럼 늘고 있다. 간만에 언론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느낀 시민들의 격려와 응원이 JTBC에 쇄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만할 일은 아니다. 진작 언론이 권력의 불의와 비리에 맞서는 감시견 역할을 제대로 했다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사태를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권력이 약점을 보이자 언론이 발톱을 세워 달려들고 있다는 뼈아픈 지적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대통령 앞에서 용기 있게 손을 들고 질문하는 기자가 몇 명만 있었어도 우리 사회가 이런 수치스러운 사태를 겪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최종적인 책임은 당연히 검찰의 몫이다. 아무리 언론이 제 역할을 해도 검찰이 나서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이번에도 검찰은 청와대의 눈치를 보며 뒷짐을 지고 있다가 뒤늦게 수사에 뛰어들었다. 그나마 언론이 제기한 의혹을 증거와 진술을 통해 혐의로 확정하는 데 그쳤을 뿐 추가로 밝혀낸 것은 많지 않다. 언론은 사회의 목탁(木鐸)일 뿐 수사기관이 아니다. 검찰이 제 역할을 할 때 정의는 구현될 수 있다.

모처럼 언론과 검찰의 컬래버레이션이 빛을 발했다. 언론과 검찰이 각자 제 자리에서 묵묵히 맡은 역할을 다할 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같은 시대착오적인 권력형 비리를 막을 수 있다. 헌법을 아무리 바꿔 본들 언론과 검찰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