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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 부모 덕에 쉽게 명문대…도저히 참을 수 없어 나왔다” “국민이 위임한 권력 왜 최순실이 쓰나, 민주주의 무너진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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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촛불 민심 왜 분노하는가 - 서울광장

100만 촛불 민심 왜 분노하는가 - 서울광장

① 전북 김제 지평선고교 40여 명
헬조선 바꾸고 싶어서 참석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고 합니다. (중략) 대한민국을 진정한 민주주의공화국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데 작은 발걸음을 내딛겠습니다.”

지난 12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하야 촉구 촛불문화제에 참석한 전북 김제 지평선고교 1학년 이보영(17)양의 1인 발언 장면이다. 청바지와 후드티를 입은 이양의 말에 경청하던 시민들이 박수로 호응했다.

지평선고 1~3학년 학생 40여 명은 이날 학교 앞에서 택시 10여 대에 나눠 타고 익산역으로 이동한 뒤 다시 KTX를 이용해 서울에 도착했다. 학생들은 미리 준비해 온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서 학생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민주주의 국가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자명한 원칙이 무너졌다”며 박 대통령을 비판하고 하야를 촉구했다.

이어 한 명씩 돌아가며 각자의 생각을 시민들 앞에서 조리 있게 발표했다. 1학년 최시언(17)군은 “(박 대통령은) 결국 우리가 뽑은 대통령”이라면서 “시민의식이 발전해야 정치의식이 발전하고 우리나라도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2학년 정지우(18)군은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 한 명이라도 더 있어야지 우리나라가 바뀔 것”이라며 정치에 대한 관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학생 대표로 나선 2학년 김수민(18)양은 “대한민국을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 우리가 살아가야 할 나라가 조금 더 좋은 나라였으면 하는 마음으로 촛불문화제에 참여했다”고 말해 시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② 조광민(35·수의사)
동물도 리더가 문제 땐 쫓아내

수의사 조광민(35)씨는 오후 10시쯤 광화문광장에 도착했다. 병원 일을 마치고 왔다고 했다. 그는 “동물병원은 토요일이 가장 바쁜데 오늘은 희한하게 사람이 없었다. 개 주인들이 모두 이곳에 왔나 보다”며 웃었다. 그는 이날 새벽 5시까지 시민들과 함께했다. 조씨는 “동물들은 리더에게 강한 책임을 부여한다. 그리고 잘못된 리더 하나가 무리를 얼마나 위험하게 할 수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에 리더가 문제를 일으키면 곧바로 쫓아낸다”고 설명했다. 그는 “100만 명이 저항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이미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뜻이다”고 덧붙였다.

③ 시나시(28·터키 지한통신 특파원)
100만 명 평화집회는 기적

알파고 시나시(28)는 터키 지한통신 한국특파원이다. 한국에 온 지 10년이 넘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 등 한국의 대형 집회 취재를 꼬박꼬박 해 왔다. 그는 12일 집회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기적적인 일이다”고 말했다. 시나시는 “100만 명이 모였는데도 평화롭게 집회가 마무리됐고 아이부터 할머니까지 모든 세대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터키에서는 시위가 평화적으로 진행되다가도 폭력성 있는 단체가 막판에 끼어들어 시위의 본질을 흐리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④ 김효진(고3 수험생)
정유라 보면 난 실패한 기분

김효진(18)양은 고3 수험생이다. 생애 첫 집회 참가다. 수능 시험일(17일)이 닷새 남았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의 분노는 ‘불공정’ 때문이었다. 김양은 “한국 중고생은 대학을 가기 위해 잠을 줄여가며 공부하고 원서·자기소개서를 쓸 때마다 애를 먹는다. 그런데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는 부모의 권력으로 명문대에 특혜를 받아 입학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이미 실패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김양은 ‘미래’를 얘기했다. 그는 “현재 중고생들은 수년 뒤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세대다. 학생으로서 정정당당한 사회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

⑤ 조남희(61·농업)
대통령, 국민 앞에 진실해야

조남희(61)씨는 전북 정읍 감곡면에서 쌀 농사를 짓는다. 흙을 만지며 40년을 살아왔다. 그가 논 대신 광장 위에 섰다. 오전 8시 조씨는 인근 농민 40여 명과 함께 차를 대절해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나는 농사꾼이기 전에 대한민국 국민이다. 100만의 사람들과 같은 이유로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리 농촌에 살고 무지한 농사꾼이라고 해도 세상 흐름, 정치 흐름을 보고 느끼고 다 안다”면서 “어떻게 한 개인이 대통령과 나라를 농단할 수 있느냐. 대통령이 국민 앞에 진실했으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했는데, 아무도 농민을 구제하려는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⑥ 권봉근(38·영화감독)씨 가족
아이와 역사 현장에 있고 싶어

영화감독 권봉근(38)씨는 부인 맹수현(40)씨와 아들(3), 딸(2)과 함께 광장에 섰다. 그가 인파가 몰리는 그곳에 아이들을 데리고 온 이유는 명확했다. 권씨는 “광장에서 희망을 봤다. 우리가 미래를 바꾸는 순간에 아이들이 함께했으면 하는 마음에 온 가족이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난주 집회에 아들을 데리고 왔더니 뉴스에서 집회 장면이 나올 때마다 관심을 보였고, 대화할 때 질문도 많아져서 오늘은 딸까지 데리고 왔다”고 했다.

⑦ 명국화(27·취업준비생)
정치 무관심 뼈저리게 반성

명국화(27·여)씨는 취업준비생이다. 서울 노량진 고시촌에서 2년간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지만 지난 3월 낙방했다. 그 뒤 일반 기업체로 진로를 바꿨다. 그는 “열심히 해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그런데 최순실씨 등 ‘빽’ 있는 사람은 부정하게 돈과 권력을 챙겼다. 이에 항의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명씨는 “그간 정치에 너무 무심했다”면서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뼈저리게 느꼈다”고 덧붙였다.

⑧ 슌(33·싱어송라이터)
열정페이 예술가들 허탈감

싱어송라이터 슌(본명 한석훈·33)은 고3 때부터 14년간 음악 관련 일을 해 왔다. 대중가요를 만들기도 하고, 광고나 게임 등에 들어가는 배경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세월호 집회에도 종종 참여했다”는 그는 “정치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예술가들조차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고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한씨는 “열정페이만 받고 생활하는 동료 예술가들이 수두룩한데 최순실씨가 돈과 권력을 주무르며 벌인 일들을 뉴스로 보면 허탈감이 든다”고 말했다.

⑨ 최형우(19·연세대 학보사 기자)
우리가 배운 정의와 영 딴판

연세대 학보사 ‘연세춘추’ 기자인 최형우(19)씨는 “이번 사태를 보니 고등학교 때 배운 민주주의 사회, 정의로운 사회와 현실은 영 딴판이었다. 이에 항의하고 취재도 하려고 나왔다”고 참가 이유를 설명했다. “중학생 때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학보사에 들어갔다”는 최씨는 “오늘 집회에 참가한 대학생들이 수만 명 수준이다. 정유라씨의 이화여대 부정입학과 최순실씨의 국정 농단에 대한 대학생들의 분노가 그만큼 심상치 않다는 얘기다”고 말했다. 그는 또 “4·19나 6월 항쟁처럼 역사의 변곡점에는 항상 대학생이 있었다. 이번에도 대학생들이 새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100만 명이 모였는데도 질서정연하고 축제 분위기가 유지되는 것을 보면서 대한민국에 희망이 있다고 느낀다”고 덧붙였다.

⑩ 공문선(47·직장인)
자식 얼굴 보기 부끄러워 나와

경기도 용인시의 정보기술(IT) 기업에 다니는 공문선(47)씨는 부인 서현정(43)씨, 중3 아들과 함께 집회에 참석했다. 공씨는 “부끄러움 때문에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달 마이너스 통장 이자가 부담스러워 일가족이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졌듯이 서민 생활은 힘들다. 반면 최순실은 권력을 등에 업고 수천억원을 빼돌렸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화도 났지만 나 같은 기성 세대가 만들어 놓은 이런 한국 사회를 아들과 딸에게 보여주는 게 너무 부끄럽다. 자식에게 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고 말했다. 영남대 88학번이라는 공씨는 “대학 때 당시 박근혜 영남대 이사장의 퇴진 집회에 참가했고 결국 성공했다. 이번에도 대통령 하야가 가능하리라 본다”고 말했다.

⑪ 염형국(42·변호사)
법의 권위 추락해 괴로웠다

집회에 변호사들도 나왔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소속 염형국(42) 변호사는 동료 변호사들과 함께 광화문광장으로 왔다. 이날 내자동 로터리에서 경찰과 시민들이 대치하자 그곳에서 인권침해감시단 활동을 했다. 다행히 큰 충돌은 없었다. 그는 “최근 법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는 일이 잇따라 나타나 변호사로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괴로웠다”면서 “국민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집회의 자유가 있다”고 말했다. 염 변호사는 “국민이 대통령에게 위임한 권한을 최순실이 쓰는 것은 헌법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그러면서 “대한민국 국민인 게 자랑스럽다. 이렇게 거대한 규모의 집회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여는 국민이 있는 나라는 찾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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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팀=채승기·김호·조용탁·김포그니·조한대·윤재영 기자 ch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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