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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혼돈의 시대를 노래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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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호 16면

토마스 캔티의 ‘Leda and the Swan’

예술은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귀족 취미’라는 오페라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대체로 옛날 유럽을 배경 삼은 뻔한 막장드라마 성격의 스토리지만 아름다운 아리아를 제대로 듣기 위해 공연장을 찾는다. 그런데 요즘엔 오페라 관전 포인트도 달라지고 있다. 새로운 연출과 무대 디자인의 비중을 강화하는 ‘연출가의 시대’로 옮겨 오면서, 동시대성을 화두로 내걸고 옛날 유럽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믿게 하는 추세다.


11월에 만나는 두 편, 국립오페라단의 ‘로엔그린’(11월 16·18·20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과 서울시오페라단의 ‘맥베드’(11월 24~27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가 주목되는 것도 그래서다. 각각 현대 오페라 연출의 혁신을 이끌고 있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카를로스 바그너와 장르를 넘나드는 공연계 총아로 첫 오페라에 도전하는 고선웅이 연출을 맡아 19세기 오페라의 현대적 재해석 대결에 나섰다. 이들의 무대는 어떤 새로움을 보여줄까. 분명한 건 탐욕과 죄악으로 얼룩진 우리 사회의 내면을 드러내고, 이 위기에서 건져내 줄 구원자를 기다리는 우리의 자세를 새삼 돌아보게 할 것이란 거다.

테오도르 샤세리오의 ‘맥베드와 세 마녀들’

[탐욕과 악의 중독에 대한 경고, ‘맥베드’]


“탐욕이 에너지가 되고 미덕이라고 자랑하는 시대입니다. 탐욕은 자연스럽게 악함으로 연결되는데, 탐욕이 조장되니 악함에 대한 불감증이 결국 중독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이런 중독은 결국 파멸로 가게 된다는 걸 셰익스피어가 통렬히 경고한 것이 ‘맥베드’입니다. 400년 후인 지금도 귀 기울여야 할 이야기죠.” (이건용 서울시오페라단 예술감독)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맞아 지금 세계 오페라계는 ‘맥베드’ 재해석 열풍이 뜨겁다. 로열 오페라하우스를 비롯해 바이에른 국립극장·비엔나 오페라극장 등 유럽 주요 극장들이 ‘맥베드’를 공연했고, 세계적인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도 LA 오페라·베이징 NCPA 오페라하우스 등에서 ‘맥베드’를 노래했다.


사실 베르디의 ‘맥베드’는 세계적으로 드물게 상연되는 레퍼토리다. 음악과 드라마 양쪽에서 고난도 기교를 요구하는 까다로운 작품이기 때문이다. 무대 전환이 유난히 많고 성악가에게 드라마틱한 연기력까지 요구한다. 국내에서는 서울시오페라단이 1997년 국내 초연한 이래 2008년 국립오페라단 공연이 유일했고, 이번에 서울시오페라단이 20년 만에 연출가 고선웅·지휘자 구자범이라는 최고 예술가들과 함께 다시 제작에 나섰다. 유럽 무대에서 맥베드 역으로 정평난 바리톤 양준모를 비롯해 소프라노 오미선 등이 출연한다.


‘맥베드’는 베르디가 처음 완성한 셰익스피어 작품으로, 1847년 초연됐다. 야심가인 맥베드 장군과 그의 아내 레이디 맥베드가 마녀의 계시로 왕을 살해하고 미쳐가는 과정의 내면적 갈등을 섬세하게 다룬 대작이다. 이 작품에 특별히 열정을 품었던 베르디는 당시 오페라의 관행을 깨고 바리톤과 드라마틱 소프라노를 주인공으로 세우는 과감한 음악적 시도로 인간의 욕망과 잔인성을 강렬하게 표현했는데, 그의 작품 중 가장 개성적이고 예술의 정점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건용 예술감독은 “베르디가 최고로 극적인 음악을 만들어놨지만, 구자범과 고선웅이 있어 이 작업이 가능하다 생각했다”면서 “독일 오페라극장에서 경험이 많은 구자범에 비해 고선웅은 오페라가 처음이지만, 텅 빈 무대에서 공간과 상황을 만들어내는 그의 연출력에 매우 감동했다. 고선웅이라면 세종대극장의 거대한 무대를 잘 요리해 낼 것”이라고 자신했다.


구자범 지휘자로서는 2013년 경기필 상임 지휘자를 사퇴한 이후 본격적인 지휘 복귀 무대라는 것도 음악계의 이슈다. 국내에서는 주로 교향곡 지휘자로 활동했지만 독일 하노버 국립극장·다름슈타트 극장 등 유럽 무대에서 오페라 지휘자로 활동했던 그의 숨겨진 면모를 확인할 기회기도 하다.


구자범은 “베르디의 ‘맥베드’를 잘 들여다보면 놀랍도록 지금 우리 시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면서 “합창단을 주목하라”고 주문했다. 원작의 세 마녀가 오페라에서는 합창단으로 등장해 극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데, “합창단을 통해 바라본 맥베드”라 할 만큼 그 역할이 의미심장하다는 것이다.


“마녀들의 첫 대사부터 놀라워요. ‘넌 뭐했니’ ‘숲에서 목을 땄어’ ‘넌 뭐할거니’ ‘나한테 잘못한 놈 배를 침몰시킬 거야’ ‘암초와 북풍을 빌려줄게’ 이런 식인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상황과 너무 똑같지 않나요. 권력과 탐욕에 눈먼 맥베드 부부는 왕을 죽인 다음 가장 가증스럽게 ‘신이시여’를 외치죠. 그러다 정신 없어진 맥베드가 끝까지 마녀들과 접촉하며 결국 파멸하게 되는데, 민중의 눈으로 우리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 될 거 같아요.”


믿고 보는 스타 연출가 고선웅은 권력과 탐욕에 대한 ‘중독’을 컨셉트 삼아 ‘고선웅표 맥베드’를 빚어내고 있다. 그는 “시나 희곡이 똑같고 오페라와 뮤지컬, 연극이 다 똑같다고 생각한다”면서 오페라라고 연출에 제약은 없다고 했다. ‘고전 비틀기의 달인’답게, 중세 스코틀랜드를 떠나 불특정한 시대 미지의 공간으로 옮겨 조직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갈등을 그려낸다. “굉장히 멋있는 아리아와 합창이 있는 오페라에요. 하지만 장르 특성상 비약이 있는데, 그런 부분은 시각적으로 지루할 수 있거든요. 어떻게 하면 자유로운 동선으로 드라마틱하게 표현할지 ‘고선웅식 해결’을 고민하고 있어요. 또 다른 맥베드가 나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자를 향한 이성적인 기다림, ‘로엔그린’]


“시스템이 무너지면 카리스마 넘치는 구원자가 나타나 자신만이 그 혼란을 더 좋은 세상으로 바꾸는 법을 알고 있다고 대중을 설득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맹목적인 믿음과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한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엘자처럼 자기 꿈을 희생하면서 적시에 권력자에게 그가 진정 누구인지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연출가 카를로스 바그너)


베르디의 ‘맥베드’가 탐욕과 악으로 중독된 시대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다면, 바그너의 ‘로엔그린’은 위기의 시대를 구하러 올 구원자에 대한 갈망을 반영한다. 하지만 맹목적인 갈망이 아니라 구원자도 꼼꼼히 잘 따져봐야 한다는 게 1976년 국내초연 이래 40년 만에 재해석에 나선 이번 국립오페라단 프로덕션의 참신함이다.


김학민 예술감독은 “‘로엔그린’은 110인에 이르는 오케스트라, 90명 규모의 합창단이 합류하는 엄청난 규모의 작품으로 바그너의 대표작인 ‘니벨룽의 반지’보다 더욱 도전적인 작품”이라며 “뉴 프로덕션답게 21세기 동시대를 투영할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고 싶어서 모던하고 강렬한 감각의 연출가 카를로스 바그너와 협업하게 됐다”고 밝혔다.


지휘는 미국 워싱턴내셔널오페라 음악감독인 필립 오갱이 맡고, 올해 한국인 테너 최초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데뷔한 김석철과 2013년 스위스 바젤 극장에서 엘자 역으로 유럽 무대에 데뷔해 극찬 받은 소프라노 서선영이 주역을 맡은 것도 화제다.


1850년 초연된 바그너 낭만주의 오페라의 결정판 ‘로엔그린’은 중세 기사문학 작품들을 토대로 창작한 것으로, 혼돈의 세계를 구하러 미지의 세계에서 찾아온 백조의 기사에 관한 이야기다. 10세기 초 브라반트 영주의 딸 엘자가 음해 세력의 모함으로 위기에 처하자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이 나타나 그녀를 구원해주지만, ‘자신의 이름과 출신을 묻지 말라’는 금기가 깨지자 영원히 떠나간다는 스토리. 바그너 특유의 웅장하고 낭만적인 선율이 시종일관 숭고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모든 결혼식장에서 울려 퍼지는 3막 ‘혼례의 합창(결혼행진곡)’으로 유명하다.


사실 리하르트 바그너는 19세기 중반 독일의 혼란스런 정치 상황에서 통일된 강력한 민족국가를 열망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메시아의 출현을 무조건 지지하고 신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로엔그린’에 담았다. 하지만 자칭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소셜리스트”라고 밝힌 카를로스 바그너는 이를 도발적인 시각으로 비틀었다. 먼저 배경을 중세의 브라반트에서 현대사회로 옮겼다. 정치 문제로 붕괴 위기에 처한 어느 나라를 무대로, 민주주의 의회를 연상시키는 세트 위에 로엔그린이라는 마술적인 존재가 등장해 현실과 마술을 오가며 혼돈에 빠진 시공간을 연출한다.


흥미로운 건 ‘메시아를 향한 질문’에 대한 관점의 차이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을 해버린 엘자를 통해 어리석은 인간의 호기심과 불안을 대변하려 했지만, 카를로스 바그너는 민중이 응당 해야 할 질문을 던진 것으로 “동화적이 아닌 현실적인 해석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맹목적 믿음을 요구하는 카리스마 지도자가 더 나은 세상을 이끈 적은 없는 반면 무조건적인 복종은 항상 더 큰 재앙을 야기해 왔다. 그 사람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성스럽고 숭고한 바그너의 음악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로엔그린이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할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정체를 정확히 따져봐야 할 정치적 지도자’가 되니 말이다.


이 차이가 무대에 과연 어떻게 반영될까. 김학민 예술감독은 “종교적 의미에 집중했던 과거의 스토리텔링에 비해 종교를 넘어선 구원자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미래지향적 관점”이라며 “연출가의 독자적 해석이 주류가 된 시대에 원본성을 해치는 부분은 있게 마련이지만 그런 충돌이 있으니 재미있다. 카를로스가 극단적 연출가는 아니지만 그 충돌의 결과를 흥미진진하게 기다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국립오페라단·서울시오페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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