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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경의 Shall We drink] <41> 타이베이 카페의 재발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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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공장에서 문화예술공원으로 탈바꿈한 송산문화원구.

담배공장에서 문화예술공원으로 탈바꿈한 송산문화원구.

첫눈에 반한 건 아니었다. 7월의 타이베이는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기엔 지나치게 소박하고, 맹렬하게 더웠다. 명색이 대만의 수도인데, 색이 벗겨져 낡아 보이는 건물이 너무 많았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더위에 거리를 조금만 걸어도 금세 땀이 흘렀다. 무더위와 승산 없는 싸움.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아도 몸은 축축 늘어졌다. '먹방' 여행의 꽃이라 불리는 야시장에 가도 음식 열기가 섞인 후덥지근한 공기 탓에 식욕이 돋지 않았다.

타이베이가 좋아진 건 의외의 장소에서였다. ‘화산1914문화창의산업원구(이하 화산1914)’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다. 화산1914는 이름처럼, 1914년에 지은 양조장을 개조한 일종의 예술 거리다. 백년 묵은 공장의 외관은 그대로 두고, 그 안을 전시장·공연장·영화관·카페·레스토랑으로 가득 채웠다. 과연, 낡은 공장 지대 구석구석을 보물찾기 하듯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타이베이 예술영화 전용관을 기웃거리다 커피향에 이끌려, 카페에 갔다. 허우 샤오시엔(侯孝賢) 감독의 영화 ‘카페 뤼미에르(2003)’와 같은 이름의 카페였다. 호젓한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고 커피 한잔을 주문했다. 천천히 잔을 비우고 카페를 지긋이 바라보는데, ‘아, 타이베이에 다시 오게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감은 적중했다. 그해 가을에도, 이듬해 봄·여름에도, 올 봄에도 타이베이를 다시 찾았다. 게다가 갈 때 마다 도심 속 오아시스 같은 카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저 유행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가게가 아니라, 골목 안에서 오래도록 반짝이는 카페를 말이다.

펑따이 카페의 대표 메뉴 아이스 드립 커피.

펑따이 카페.

타이베이의 명동이라 불리는 시먼(西門)을 돌아다닐 때다. 코끝을 자극하는 진한 원두 향에 이끌려 ‘펑따카페이’에 들어갔다. 척 봐도 오래도록 내공을 쌓은 가게 같았다. 원두를 사려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서자 예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알고 보니 1956년 문을 연 이래 60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카페였다. 펑따카페이는 타이베이 최초로 아이스 드립 커피를 판매한 곳이란다. 일명 더치커피로 통하는 아이스 드립 커피는 6시간에 4잔 정도만 추출하는 한정판 커피다. 직접 볶은 원두 중에는 타이완에서 재배된 원두도 있는데, 사이폰(가는 관을 통하여 커피를 추출하는 방법) 방식으로 커피를 내려 마셔야 제맛이란다. 펑따카페이를 나설 때, 내 손에는 원두 두 봉지가 들려있었다. 그날은 가방에 카메라 대신 원두를 담아 다녔다.

80년 묵은 목조주택을 개조한 카페 녹도소야곡.

80년 묵은 목조주택을 개조한 카페 녹도소야곡.

중산(中山)역 인근에서 장어덮밥 가게를 찾아 헤매다 ‘녹도소야곡’이란 카페도 알게 됐다. 중산역 주변은 일제강점기(1895~1945)에 조성돼 골목마다 일본인들이 지은 집이 가득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골목 안, 울창한 나무에 반쯤 가려진 목조 건물에 녹도소야곡이 있었다.

“얼마나 오래된 건물 이예요?” 메뉴판을 내미는 점원에게 말을 걸었다. “80년 전 일본인이 지은 목조주택을 대만 건축가가 사무실 겸 카페로 개조했어요. 1층은 카페고 2층은 사무실이예요.”

핸드드립 커피를 주문하고, 정성껏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의 모습을 지켜봤다. 2층 사무실에 올라가, 설계에 몰두하고 있는 건축가들의 모습도 엿봤다. 커피의 맛은 훌륭했다. 모든 것이 차분하고도, 여유로웠다. 밖으로 나오자, 거리를 쏘다닐 기운이 다시 샘솟았다.

유에유에수덴. 낮에는 북카페지만, 밤에는 공연이 있는 바로 변신한다.

유에유에수덴. 운치 있는 파란색 목조건물이다.
유에유에수덴에서 맛본 커피.

가장 최근에 발견한 보석 같은 카페는 송산문화원구 안에 있는 북카페 ‘유에유에수덴(悅樂書店)’이다. 송산문화원구는 버려진 담배공장을 문화 예술 공원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분수를 낀 정원과 연못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유에유에수덴은 연못 옆 초록색 목조 건물로 자리해 있었다. ‘독서가 있는 곳에 삶이 있다’는 모토를 내건 북카페답게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이 멋스러웠다. 사람들은 커피 한 잔을 곁에 두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유에유에수덴은 낮과 밤의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저녁까지는 서점 겸 카페로 숨죽이고 있다가, 밤 9시부터 새벽2시까지는 각종 공연이 벌어지는 바로 변신했다.

타이베이에서 나를 반하게 한 카페 사이엔 공통점이 있었다. 옛 공간을 낡은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카페 주인만의 색을 입힌 카페. 요약하자면, 타이베이의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보여주는 카페다. 이런 공간에서 마시는 한잔의 커피는 여행의 느낌표이자, 쉼표가 되어 주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나는 그 맛을 잊지 못해 또 다시 타이베이에 갈 테다. 우연처럼 운명의 카페를 만나게 될 거라 믿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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