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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고증 잘못됐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세종로 이순신장군 동상밑과 현충사에 있는 거북선 모형, 국민학교 교과서 등 각종 서적에 있는 거북선그림이 임진란 당시 왜군을 격파했던 거북선의 참 모습을 살리지 못한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한 거북선 연구가에 의해 나왔다. 거북선에 대한 각종 자료를 모으고 연구해온 정광수씨(50)는 현재의 거북선 모형들이 ▲선수아랫부분에 있는 귀면 크기가 너무 작게 나타나 있거나 일부에서는 아예 없으며 ▲닺의 크기가 과장되어 있고 ▲노의 크기가 작으며 ▲포혈이 있는 옆면부분도 잘못 표현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정씨는 이같은 거북선의 구조문제와 함께 ▲거북선이 당시 해전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할수 있었던 이유 ▲해전의 양상 ▲당시 호남수군들의 활약과 충혼에 대한 조사등 거북선과 임신난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부족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임신난당시 거북선의 귀면은 거북선머리의 용두와 거의 비슷한 크기로 사방1m정도의 크기였다고 보았다.
정씨는 이 귀면이 해면에 닿는 적선의 선복부분에 충돌, 구멍을 뚫어 급속히 침수케해 침몰시키는 역할을 하는 무기였다고 밝혔다.
정씨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정조가 친히 쓴 충무공을 위한 신도비에서 찾고있다.
정조 신도비는 거북선에 대한 기술에서 「거북선은 고대 몽충선과 비유된다」고 쓰고 있다. 몽충선은 노산이은상의 주석에 따르면 충돌전용선으로 해전에서 적의 함선에 충돌하여 깨뜨리는 역할을 한것이다. 충무공의『난중일기』에도 층돌전에 대한 기술이 많고 일본측기록도 충돌에 의한 파괴에 대한 기록이 많다.
거북선이 충돌선이라면 충돌에 의한 파괴를 한 부분은 귀면일 수밖에 없다.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거북선에 의한 충돌에서 선복아랫부분이 사방1m정도로 뚫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정조시대 왕명에 의해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엔 임신난당시의 거북선그림(좌수영거북선)이 그려져있다. 이 그림은 거북선의 용두와 귀면의 크기를 비슷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림참조>
정씨는 왕난당시의 거북선은 충돌전 중심의 전략을 따르는 귀면을 반드시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정씨는 세종로 이순신장군 동상앞의 거북선모형은 임난이후 해전이 함포전으로 변함에 따라 귀면이 없어진 정조때의 변형 거북선의 모습을 그대로 조형한 것이며 현충사·여수등의 거북선 모형도 충돌형돌기의 중요성을 모른채 제작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각종서적에 실린 거북선그림 역시 같은 잘못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학교 1학년 바른생활 64쪽에 실린 거북선 그림도 귀면이 없이 그려져있다.
거북선의 전면이 수직구조임도 중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닻이 오늘날의 여러모형에서 귀면을 가리고 있고 그 크기가 항해때 앞문으로 넣을수 없을 만큼 크게 그려진것도 잘못된 것이다.
거북선의 승전원인에 대한 연구도 부족하다. 정씨는 거북선이 당시(L세기)해전의 중요양상이었던 충돌전과 창칼싸움·사격전·함포전등에서 우수한 기능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충돌전에서는 귀면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함포전에서 화포의 파괴력·화포수에서도 일본보다 2배이상 우세했다고 지적했다.
당시 우리수군의 화포는 대장군전을 섰다. 일본함선이 산탄형포탄을 쓴데 비해 거북선은 폭발헝의 화포를 써 파괴력이 컸다.
정씨는 거북선의 구조, 해전의 양상에 대한 연구와함께 당시 호남수군들의 분전상도 더 밝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씨는 옥포해전에서 최후의 노량해전까지 7년간의 해전을 통해 약2만의 수군이 산화했는데 이들의 충혼은 오늘날까지도 충무공에 대한 현창에 가리워져 크게 부각되지 못하고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현재의 거북선 연구는 아주 부진한 상태다. 「거북선연구소」가 있으나 전문연구요원, 예산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학계의 관심도 크지않다. 세계적인 전함이고 민족과학의 심벌인 거북선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연구풍토가 마련되어야 한다는게 정씨의 주장이다. <임당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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