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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럭셔리 패션, 미술관을 탐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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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과 제품의 경계에 서다

| 럭셔리 패션 브랜드들의 미술관 전시 어떻게 볼까

에르메스가 19일부터 서울 한남동 D뮤지엄에서 여는 ‘파리지앵의 산책’전은 11개의 방으로 꾸며진다. 사진은 그 중 하나인 ‘걸어다니는 지팡이들(Walking sticks)’의 파리 전시장 모습. 과거 도시 산책의 필수품이었던 지팡이를 모티브 삼았다. 일러스트레이터 위고 가토니가 디자인한 벽지 위에 로맹 로랑이 연출한 지팡이 소재 단편영화를 배치했다. [사진 에르메스]

에르메스가 19일부터 서울 한남동 D뮤지엄에서 여는 ‘파리지앵의 산책’전은 11개의 방으로 꾸며진다. 사진은 그 중 하나인 ‘걸어다니는 지팡이들(Walking sticks)’의 파리 전시장 모습. 과거 도시 산책의 필수품이었던 지팡이를 모티브 삼았다. 일러스트레이터 위고 가토니가 디자인한 벽지 위에 로맹 로랑이 연출한 지팡이 소재 단편영화를 배치했다. [사진 에르메스]

청담동·샹젤리제·몬테 나폴레오네·5번가 같은 각 도시의 명품거리에서만 럭셔리 브랜드를 마주치는 게 아니다. 요즘은 미술관·전시장에서도 럭셔리 패션을 만난다. 너나없이 미술관으로 달려가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패션 하우스들이 유산(헤리티지)을 예술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뉴욕·런던 등에서 시작한 ‘브랜드 전시’가 국내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티파니(2008)·프라다(2009)·폴스미스(2010)·샤넬(2012)·루이비통·디올(2015)·장폴고티에(2016) 등은 이미 전시를 마쳤고, 오는 19일부터 에르메스가 서울 한남동 D뮤지엄에서 ‘파리지앵의 산책’ 전시를 연다. 내년 역시 주요 브랜드들이 줄지어 국내 전시를 기획 중이다. 쇼윈도가 아닌 전시장에서 만나는 럭셔리 패션, 어떻게 ‘감상’해야할까.

블록버스터급 호응 이끈 럭셔리 브랜드 전시

지난해 6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렸던 디올의 ‘에스프리 디올 - 디올 정신’ 전시. 브랜드의 과거와 현재를 한국 작가 작품과 함께 선보인 이 전시엔 23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사진은 김혜련의 ‘열두 장미-꽃들에게 비밀을’과 디올의 오트 쿠튀르 의상.

지난해 6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렸던 디올의 ‘에스프리 디올 - 디올 정신’ 전시. 브랜드의 과거와 현재를 한국 작가 작품과 함께 선보인 이 전시엔 23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사진은 김혜련의 ‘열두 장미-꽃들에게 비밀을’과 디올의 오트 쿠튀르 의상.

에르메스의 전시 제목은 ‘파리지앵의 산책’이다. 주최측은 “도시를 거니는 행위 자체가 자유로운 예술이며, 이것이 에르메스를 대표하는 본질”이라고 이 전시를 설명했다. 유유자적하게 파리 도심을 거니는 걸음걸음이 브랜드가 내세우는 창조성의 원천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전시장도 마치 거리를 산책하듯 설정했다. 과거 파리지앵들이 소나기를 피해 급하게 카페에 들어갔다 소지품을 두고 나오는 상황, 파리 광장 주변의 숨겨진 통로 같은 공간을 니콜라스 투르트 등 미디어 아티스트의 작품으로 선보인다. 시계·가방·자전거같은 에르메스 제품이 여기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에스프리 디올’에 전시된 화이트 드레스.

‘에스프리 디올’에 전시된 화이트 드레스.

제품을 작품으로 환원하는 시도는 사실 낯설지 않다. 요 몇 년간 열렸던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전시가 대부분 그러했다. 지난해 루이비통은 브랜드의 과거부터 현재, 미래를 건축적 요소를 더해 전시하면서 대표적 핸드백인 ‘쁘띠뜨 말’을 제작하는 과정을 시연했고(‘시리즈2-과거·현재·미래’, 광화문 D타워). 샤넬은 브랜드 아이콘인 트위드 재킷을 입은 셀레브리티 100여 명의 사진전을 연 데 이어(‘더 리틀 블랙 재킷’, 비욘드 뮤지엄), 2014년에는 가브리엘 샤넬에게 영감을 준 모티브와 실제 작업물을 장소와 연결지어 소개하는 전시를 했다(‘컬처 샤넬전-장소의 정신’.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디올 역시 창업자 크리스천 디올의 초기 의상부터 최신 컬렉션·화장품·향수 등을 총망라해 서도호·이불 등 한국 작가 작품과 함께 선보였다(‘에스쁘리 디올’,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지난해 4월 서울 광화문 D타워에서 열린 루이비통의 전시 ‘시리즈2 : 과거 현재 미래’. 2015 SS컬렉션 쇼장을 그대로 옮긴 공간으로, 브랜드의 미래적 이미지를 표현했다.

지난해 4월 서울 광화문 D타워에서 열린 루이비통의 전시 ‘시리즈2 : 과거 현재 미래’. 2015 SS컬렉션 쇼장을 그대로 옮긴 공간으로, 브랜드의 미래적 이미지를 표현했다.

대중의 호응은 블록버스터급이었다. 샤넬의 ‘장소의 정신’은 12만 명(37일), 디올은 23만 명(67일)의 관람객을 동원했으니 말이다. 서울시립미술관 월평균 방문객이 6만 여 명(2015년 기준)인 것에 비하면 대단한 숫자다. 루이비통 ‘시리즈2’ 역시 관람객이 몰리면서 전시를 8일 더 연장했다. 럭셔리 브랜드 전시의 흥행 파워는 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알렉산더 맥퀸의 회고전 ‘야만적 아름다움’은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만 66만여 명, 런던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에선 49만3000명이 다녀갔다. 둘다 해당 미술관 역대 톱3에 드는 숫자였다.

문화행사 VS 고도의 상술

에르메스의 ‘파리지앵의 산책’ 전시 중 하나인 ‘광장(The square)’. 브랜드의 대표 가방과 아티스트 엠마누엘 피에르의 삽화로 꾸몄다.

에르메스의 ‘파리지앵의 산책’ 전시 중 하나인 ‘광장(The square)’. 브랜드의 대표 가방과 아티스트 엠마누엘 피에르의 삽화로 꾸몄다.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전시에는 늘 상업성 논란이 제기된다. 하지만 브랜드측은 억울하다는 반응이다. 단지 브랜드의 고유한 자산을 대중과 공유하는 시도라는 주장이다. 오래 전 만든 물건은 당대엔 상품이었을지 몰라도 현재로선 문화적 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것. 가령 디올의 ‘뉴룩(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가는 원피스와 스커트 정장)’은 여성 복식사를 바꾸는 혁신적 시도였고, 루이비통의 사각 트렁크는 공간의 효율성을 디자인으로 바꾼 사례라는 식이다.

흥미로운 점은 럭셔리 브랜드일수록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 이를 토대로 한 문화예술 후원활동을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까르띠에는 1984년 현대미술 후원을 위한 현대미술재단(FondationCartier)을 세워 알레산드로 멘디니, 마크 뉴슨 같은 산업디자이너를 후원한 이력이 있다. 또 프라다 재단(Fondazione Prada)은 건축부터 영화, 그리고 철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서 다양한 행사를 지원해 오고 있다. 루이비통문화예술재단 역시 2년 전 파리 도심에 건축가 프랑크 게리가 설계한 미술관을 지어 상설 컬렉션 전시부터 기획전시까지 다양한 전시를 하고 있다.

2014년 8월 DDP에서 열린 ‘컬처샤넬전-장소의 정신’.

2014년 8월 DDP에서 열린 ‘컬처샤넬전-장소의 정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속내를 의심한다. 럭셔리 시장이 정체기에 접어들면서 포장(전시)만 바꿔 고도의 마케팅을 펼친다는 주장이다. 패션 큐레이터 김홍기씨는 “헤리티지 그 자체를 알리는 목적보다 그것의 자본성을 인정받으려는 접근”이라 말한다. 대중적으로 브랜드의 가치를 확인시킴으로서 기존 고객에게는 만족감을, 잠재 고객에게는 새로운 욕망을 제시한다는 얘기다. 그 근거로 그는 셀레브리티 홍보를 꼬집는다. 유명인을 초대해 오프닝 행사를 벌이고 이를 다양한 채널로 알리는 방식 말이다. 그는 “대중이 알아서 찾는 전시라기보다 한 번쯤 가봐야할 무언가로 만드는 것 자체가 명성을 이용한 전략”이라고 해석한다. 일부 사람만 모아놓고 10여 분 만에 끝나는 패션쇼와 달리 많은 대중이 시간을 들여 오래 보는 ‘체험’이라 더 강력한 마케팅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미술관은 럭셔리 브랜드의 상업성에 휘둘리고 있는 것일까. 계원예술대 권정민 교수(전시디자인과)는 “세계적으로 대형 기획전이 안 나오고 무엇이 좋은 전시인지도 알 수 없는 춘추전국 시대에 수익을 안정적으로 가져다주는 브랜드 전시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목적이 무엇이든 전시공간도 득을 본다는 얘기다. 2000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이 처음으로 조르지오 아르마니 전시를 열었을 때 미술계에서는 ‘1400만 달러(약 160억원) 후원금을 챙겼다’는 비난이 거셌지만 요즘은 국내외 사립 갤러리가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가치는 인정해야 … 전시 방식이 관건

2009년 서울 경희궁에서 선보인 프라다 전시 ‘웨이스트 다운’. 구조물이 회전할 때마다 전시물을 달리하는 방식으로 화제를 모았다. 첫 전시물로는 미우치아 프라다가 1988년부터 20년간 디자인한 스커트 60점을 공개했다.

2009년 서울 경희궁에서 선보인 프라다 전시 ‘웨이스트 다운’. 구조물이 회전할 때마다 전시물을 달리하는 방식으로 화제를 모았다. 첫 전시물로는 미우치아 프라다가 1988년부터 20년간 디자인한 스커트 60점을 공개했다.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다들 인정하는 바가 있다. 어쨌든 전시할 수 있는 유산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의 가치다. 대림미술관 기태은 홍보팀장은 “디자인의 혁신성, 예술가로서 창의성은 높이 사야한다”고 강조한다. 세월이 흘러도 사랑받는 제품에는 분명한 가치가 있고, 그 기준에는 창조성이 명확히 반영되어 있다는 뜻이다. 김홍기 큐레이터 역시 “아카이브라 하면 보통 50년 이상의 역사를 의미한다”면서 “제품에 불과했던 과거를 발굴하고, 간직하고, 또 관리하면서 문화적 자양분을 만든 노력 자체는 평가절하할 이유가 없다”고 못박는다.

그래서 결국 논란은 ‘무엇을’ ‘어디에서’가 아니라 ‘어떻게’의 문제로 귀결된다. 박신의 미술평론가 겸 경희대 교수(문화예술경영학과)는 “제품이든 작품이든 ‘창의성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전시라면 결국 하우투(How to)에 따라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큐레이팅에 관한 문제라는 지적이다.

올 3월 DDP에서 열린 ‘장 폴 고티에’ 전. 7개 섹션에서 220여 점의 의상과 패션 스케치, 사진 등을 선보였다. 움직이는 마네킹과 멀티페이스 마네킹을 설치하고, 다양한 영상과 무대장치를 활용함으로써 전시의 주목도를 높였다.

올 3월 DDP에서 열린 ‘장 폴 고티에’ 전. 7개 섹션에서 220여 점의 의상과 패션 스케치, 사진 등을 선보였다. 움직이는 마네킹과 멀티페이스 마네킹을 설치하고, 다양한 영상과 무대장치를 활용함으로써 전시의 주목도를 높였다.

런던예술대학 교수이자 박물관 큐레이터로 이름난 주디스 클락도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상업성 여부가 전시의 타당성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서 “단순한 역사의 나열, 유산의 진열이 아니라 특정한 주제로 아카이브를 재구성하는 게 관전 포인트”라고 밝힌 바 있다.

이제 무슨 전시든 물음은 단순하다. ‘지금 당신에게 어떠한 자극을, 아니 감동을 주고 있는가.’

에르메스는 왜 난해한 설치미술 택했나

| 한국 전시 앞둔 큐레이터 브뤼노 고디숑

에르메스가 19일부터 12월 11일까지 서울 한남동 디 뮤지엄에서 여는 ‘파리지앵의 산책’은 ‘지난해 런던 사치 갤러리에서 첫 선을 보인 이후 파리 센강변 뽀르 드 솔페리노, 두바이 몰의 분수대 선착장을 거쳐 서울에 오는 전시다.
프랑스 루베(Roubaix) 지역의 예술 박물관인 라 피씬 큐레이터 브뤼노 고디숑(Bruno Gaudichon·60)이 기획했고, 디자이너 위베르 르 갈(Hubert le Gall)이 구조물 디자인을 맡았다. 11개의 방으로 나뉜 전시장은 각각 다른 미디어로 작업하는 작가의 작품들로 꾸며졌다. 에밀 에르메스 박물관 소장품은 물론 에르메스의 현재 컬렉션(상품)까지 전시의 오브제로 삼았다. 전시를 앞두고 고디숑을 서면 인터뷰했다. 전시를 앞두고 18일 방한하는 그는 “이번 전시는 설치예술에 가깝다”며 “관람객 역시 그 유희성·창조성에 반향을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주제가 ‘도시를 걸어다닌다는 것 자체가 예술’이라니. 너무 난해하다.
“도시의 움직임을 표현하고 싶었다. 파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첫 번째 방에서 상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청각적으로는 산책의 여유로운 리듬도 떠올렸다. 그 매개체가 또각또각 소리나는 지팡이다. 관람객 각자가 자신의 지팡이를 들고 산책을 나서는 상상을 해보라. 어렵지 않다.”

-에르메스 아카이브가 잘 녹아든 전시라는 평이 많다. 아카이브를 어떻게 활용했나.
“아카이브는 정말 살아있는 성역같은 곳, 즉 영감을 주는 보물찾기 같았다. 에르메스 최고의 제품들과 아름다운 오브제들을 발견하는 특권을 누리다니. 또 에밀 에르메스(3대 경영인)의 소장품을 관리하는 메네우 드 바즐레르와 아카이브 컬렉션 책임자 마르크 스톨츠, 두 사람의 대단한 정성에 놀랐다. 전시 도입부에 있는 지팡이는 마이센 도자기와 꿩 깃털이 조화를 이룬 파라솔 지팡이다. 박물관에 있는 원본은 너무 약한 상태라 전시가 어려웠는데 바즐레르가 지인 등을 동원해 완벽하게 재연해 냈다.”

-전시품은 어떤 기준으로 골랐나.
“당연히 전시의 주제, 그리고 전시의 여정을 생각했다. 또 관객과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기준이 있었다.”

-런던·파리·두바이 등 전시 때마다 현지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작업을 선보였다. 서울 대표인 제이 플로우는 어떻게 골랐나.
“미리 그 지역 아티스트의 포트폴리오를 받아 한 명을 고른다. 제이 플로우는 그가 전달하는 언더그라운드적 느낌이 특별한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판단해 선택했다.”

-당신 말대로 여유로운 산책이 ‘예상치 못한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서울에서 뭘 발견할 수 있을까.
“한국이 처음이다. 서울에 도착해 전시장으로 가는 길이 ‘발견하는’ 그 순간이 되지 않을까. 뭔가 중요한 순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사실 혼자 몇 시간이라도 거닐며 도시의 문화적 공간에 빠져들고 싶다. 눈 앞의 모든 게 새로운 것이라니, 인생의 진정한 선물처럼 기다려진다.”

글=이도은·김민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각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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