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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안 보는 것이 나았을 것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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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4호 34면

지난날


한국대중음악사전 가수 유재하가 2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처음이자 마지막 앨범에 실린 대표곡


그 여자의 사전 11월의 첫날이면 어김없이 라디오에 흘러나와 ‘좋았던 지난날’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 그러나 ‘다시 못 올 지난날’은 그저 추억과 환상으로 덧칠해 ‘영원히 간직’하는 대상일 뿐임을 다시 일깨워주는 노래.


올해도 어김없었다. 11월이 되었고 유재하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지난 옛일 모두 슬픔이라고 하면서도~ 문득문득 흐뭇함에 젖는 건 왜일까~.”


1987년 나는 갓 스무 살이었고 밖에서는 “호헌철폐 독재타도” 외침 속에 이런 노래를 좋아한다는 말조차 꺼내기 힘든 엄혹한 시대를 숨죽이며 살았지만, 혼자서는 몰래몰래 그의 노래에 빠져들었다. 문득 문득 흐뭇함에 젖는 20대 초반 지난날의 추억 속에는 유재하의 카세트 테이프를 닳도록 끼고 듣던 내가 있었다.


그리고 그도 있었다. 넘치는 카리스마 한 편에 어딘지 모르게 모성애를 자극하는 듯한 여린 기운을 한꺼번에 가진 신비한 남자. 활짝 웃을 땐 눈이 부신 왕자님의 미소를 날리지만 왠지 모를 서늘한 그늘이 언뜻언뜻 보이던 남자.


나는 그 선배와 사귀진 못했다. 뽀얀 얼굴을 가진 서울 남자였던 그 선배에 내 마음을 고백하기엔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시골출신 여학생의 근거 없는 열등감은 컸다. 게다가 그 선배는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넘볼 수 없는 초일류 층 집안의 자제분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를 나는 동경하기만 했다. 사귀지 못하니 그 선배에 대한 환상이 더 커졌다.


어느 날 어스름 하굣길에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불러 세웠다. 옆구리에 책을 두어 권 낀 그가 잔뜩 상체를 웅크린 채로 담뱃불을 붙이고 있었다. 연극 무대 위에서 핀 조명을 따로 받는 주인공 마냥 동그란 라이터불이 그렇지 않아도 멋진 그 사람 주위를 밝혔다. 순간 그는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긴 남자였다. “밥 사줄까?”


후들거리는 다리로 어떻게 카페까지 걸어왔는지 모르겠다. 경양식 함박 스테이크였다. 역시, 메뉴 선택도 탁월했다. 그때 카페에서 흘러나왔던 곡이 ‘지난날’이었던가 아니면 그가 “요즘 유재하 좋지, 들어봤어” 그랬던가. 아무튼 유재하로 시작해서 운동권 친구들 눈치보느라 내놓고 이야기하기도 힘들었던 팝송 이야기도 하고 소설 이야기, 친구 이야기, 고향 이야기까지…꿈을 꾸는 듯했다. 그러다 그가 불쑥 “사실 내 친어머니는 고등학교 때 돌아가셨어”라고 했다. 아, 그래서 선배의 표정이…그런데 그게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아니 오히려 나는 그의 맑고도 슬픈 눈빛 속에 풍덩 빠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역시 시골 여학생의 열등감은 그날도, 그날 이후로도 이 선배와의 연애를 가로막는 튼튼한 장벽이었고 그래서 결국 아무 일도 없었다. 귀족적이고 세련되고 가련하기까지 한 그 선배는 나에게 오랫동안 지난날을 떠올릴 때마다 한 번씩 꺼내어 보는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살아가는 게 힘들 때는 그 시절로 돌아가 그와 다시 끈끈한 삶의 인연으로 엮이는 생각을 품어보기도 했다.


15년 뒤쯤, 낯선 땅 미국에서 그와 내가 한 시간 거리에 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땐 까무러칠 뻔 했다. 당장 그를 만나야 했다. 콩당콩당 뛰는 가슴으로 그가 기다리고 있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이번엔 함박 스테이크가 아니라 더 근사한 안심 스테이크였다. 그런데 그것을 그가 입에 넣는 순간, 아 그것은 내가 혐오해 마지 않고 하루키가 지옥의 문을 여는 소리 같다고 했던 “후루룩 쩝쩝” 바로 그 소리였다.


또 까무라칠 뻔 했다. 눈을 들어 다시 보니 이미 그 선배의 머리는 벗겨지기 시작하고 우물 같던 그 눈동자도 흐릿해져 있었다. 지난날 귀족적인 자태의 왕자님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왜 그땐 그게 보이지 않았을까. 도망치듯 자리를 뜬 뒤 한인 사회에서 흘러나온 소문을 들었다. 그는 라스베이거스 도박장을 수시로 드나들며 빚더미에 올라앉아 동창회 명부를 뒤지며 선후배들을 찾아가 손을 벌린다던가.


11월이 되면 ‘지난날’이 흘러나온다. “잊지 못할 지난날을 난 꾸밈 없이 영원히 간직”할 것이다. 하지만 지난날은 지난날일 뿐 오늘을 살고 있는 변해버린 나는 그 환상 속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을 살고 있고,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서도 안 된다는 걸 씁쓸하게 되새긴다. ●


이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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