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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김병준이 쓴 반전 드라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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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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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이 벌어진 뒤 박근혜 대통령이 취한 세 가지 조치는 다 헛발질이었다. 첫째, 지난달 25일의 100초 사과. 안 하느니만 못했다. 참회와 진실이 없었다. 무엇에 쫓기는 듯한 사과였다. “대통령이 숨기는 게 뭐냐”는 역풍이 불었다. 둘째, 28일 심야의 청와대 참모진 일괄사퇴. 너무 늦었다. 비서실장과 3인방, 관련 수석들을 모두 경질하고도 효과를 못 봤다. 바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촛불시위가 불 붙었다. 셋째, 2일 아침의 김병준 총리후보자 발표. 느닷없었다. 사람은 괜찮은데 절차와 방법이 영 틀렸다. 최소한 국회 교섭단체인 3당의 리더들과 상의하는 순서를 밟았어야 했다. 거국중립내각의 대의 때문에 내놓고 반대하지 못했던 두 야당의 뺨을 때린 격이었다. 이들에게 번듯하게 반대할 명분을 줬다. 통치의 세 영역인 소통(메시지)→인사→정책을 돌아가면서 실패한 셈이다.

대통령 압박한 하극상적 발언
야당도 거국내각 실현 협조를

박 대통령의 선택이 실패하는 이유는 뭘까. 선택의 3요소는 타이밍·순서·임팩트다. 박 대통령은 이 필수 요소들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무감각하다. 지금 최순실이 비운 어둠의 자리를 엉뚱한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친박의 몇몇 인사들이다. 그들은 여전히 “조금만 버티면 풍파는 지나간다”는 달콤한 말로 대통령에게 헛된 망상을 심어 주고 있다. 대통령과 친박 핵심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 일은 결코 오지 않는다.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 있다. 순서상 진작 했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하면 타이밍이 크게 늦지 않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임팩트 있게 해야 한다. 주말 광화문 시민집회가 열리기 전 국민 앞에 나서는 것이다. 지난 4년간 최순실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소상하게 밝혀야 한다.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자신의 운명을 국민에게 맡긴다고 선언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대통령직의 유지든 탄핵이든 하야든 국민적 합의 같은 게 뭉실뭉실 형성될 것이다. 박 대통령은 담백하게 거기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어제 김병준이 만들어 낸 반전(反轉) 드라마다. 김병준은 대통령의 총리 지명을 날름 받아먹지 않았다. 하루 장고한 뒤 “대통령의 방패막이가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현안 세 가지에 대해 소신을 밝혔다. 첫째, 박 대통령은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된다고 했다. 대통령에게 새누리당 탈당을 건의할 수 있다는 게 둘째, 모든 장관 임명을 여야·국회와 협의하겠다는 게 셋째다. 이 세 가지는 친박 세력을 제외한 여야 3당과 주요 대선주자들, 광장의 시민들이 줄기차게 요구해 온 사안이다. 박 대통령은 이 주장을 외면했기에 탄핵·하야론에 직면했다.

김병준은 역대 어떤 총리후보자보다 용감했다. 공개적으로 임명권자인 대통령을 압박했다. 박 대통령 입장에선 김병준에게 허를 찔렸다는 낭패감을 가질 수 있겠다. 하극상적 압박과 낭패스러운 배신감은 두 사람의 감정 문제다. 서로 알아서 정리해 주기 바란다. 박 대통령이 저지른 권력 사유화 사건으로 조국은 참혹하고 수치스러운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외부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권력자의 암매함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나라를 구출해야 한다. 박 대통령은 김병준의 발언을 100% 수용하는 방식으로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 엉뚱하게 반응하면 상태는 악화될 뿐이다. 더 이상의 기적은 없다. 대통령은 여기서 또 미적거릴 텐가. 개인에게 불행, 나라에 혼란이 있을 뿐이다. 이쯤 되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도 김병준을 도와야 한다. 김병준을 국회가 파견한 총리로 활용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행여 야당이나 유력 후보자들이 대권 전략상 무정부적 혼란이 낫다는 오판을 범하지 않길 바란다. 다 굴러들어온 정권인데 망해가는 정부에 괜히 발을 담글 필요가 있느냐는 정파적 계산법도 중지해 주길 바란다. 무너진 나라에서 정권을 잡으면 무슨 소용 있나. 나라부터 살려놓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 거국중립내각의 첫 단추는 꿰어졌다. 김병준 내각은 대통령제 헌법의 영속성을 유지하면서 의회 통치를 가동하는 초유의 정치실험이 될 것이다.

전영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