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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 2035

마음먹어도 자꾸만 드는 생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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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이현 기자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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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
JTBC 경제산업부 기자

“언제부터인지 우리 내부에서는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잘못된 풍조가 퍼져가고 있습니다. 법을 불신하고 경시하는 풍조 속에 떼법 문화가 만연하면서 사회적 비용이 증가하고, 대외 경쟁력까지 실추되고 있습니다. 자기 비하와 비관, 불신과 증오는 결코 변화와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박근혜 대통령의 8·15 경축사 중)

그렇다. 사람이 하는 일은 뭐든지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혹자는 ‘최순실 게이트’가 박근혜 대통령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한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총을 맞고 숨진 일, 강력한 권력을 가진 아버지 곁에서 그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다가 하루아침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경험은 흔치 않다. 그 때문에 박 대통령이 다른 이를 절대 믿지 못하고, 어려운 시절 자신을 챙겨준 최씨 일가 등 몇몇 인물의 말만 맹목적으로 신뢰했다는 것이다.

주변에 신혼이거나 갓난아이를 키우며 갈등을 겪는 사람들 얘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각자가 어린 시절 원가족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새 가정까지 끌고 간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릴 때 사고 싶은 걸 못 산 게 한”이라며 과소비를 계속 한다든지, 아이를 키우며 감정적이었던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한다든지, 배우자를 끝없이 의심하며 집착하는 성격 등이 그렇다. 생각해보면 이미 십수 년 전, 부모 없이는 생존이 어려웠던 때의 일이고 어른이 된 지금은 많은 것이 바뀌었는데도 그냥 자기 마음이 그 기억에 매여 있는 것뿐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한국전쟁, 쿠데타, 독재, 외환위기 등등 온 국민이 경험한 트라우마가 한두 개가 아니다. 날벼락 같은 전쟁에 집도 잃고 가족도 잃어 본 노년층이 생각할 때 북한 정권은 용서할 수 없는 분노의 대상인 것이 당연하다. 하고 싶은 공부도 못하고 새벽에 출근해 밤까지 일했던 세대의 눈에는 요즘 젊은이들이 ‘근성 부족’으로 보일 법도 하다. 콘크리트로 벽을 쌓은 듯 말이 통하지 않는 어른들을 답답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몸이 기억하고 있는 그 시절의 기억 때문임을 알고 있다.

우리 세대는 어떨까. 헬조선, 흙수저란 표현 이전에도 이미 오렌지족, 강남 8학군, 조기 유학, 도피성 유학 같은 말들이 자기 비하의 싹을 틔웠다. 그런데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라는 도발도 부족해서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돈 많고 치맛바람 센 부자 엄마’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니. 마음먹기 달렸다는 그 말이 얼마나 공허한가. ‘열심히 달려봐야 부잣집 애들을 이길 수 없다’는 2030의 트라우마는 오늘 또, 한 뼘 더 자랐다.

이현 JTBC 경제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