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당신들의 천국, 필요 없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기사 이미지

이상언
사회2부 부데스크

‘저희가 어찌하여 그토록 원장님의 천국을 수락할 수 없었고 원장님을 끝끝내 용납할 수 없었느냐에 대해서는 좀 더 이야기를 계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중략) 그것은 한마디로 원장님과 섬사람의 길이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원장님이 아무리 섬사람들을 생각하고 섬을 위해 노고를 바치고 계셨다 해도 원장님은 결국 그 섬사람들과 같은 운명을 사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원장님께서 꾸미고자 하신 그 섬사람들의 낙토가 원장님과 섬사람들의 공동의 천국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장님은 저들의 천국이라 하고 저들은 원장님의 천국이라 말하게 되겠기 때문입니다.’(378∼379쪽)

이청준(1939∼2008)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서 소록도 병원장 조백현에게 보건과장 이상욱이 보낸 편지 글이다. 조 원장은 소록도 사람들에게 오마도 간척 공사를 시켰다. 한센병에서 치유된 사람들이 살아갈 ‘천국’을 선사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노역에 동원된 섬 사람들은 고통에 시달렸다. 그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원장을 ‘처단’할 기회도 가졌으나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조 원장은 이런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과장의 편지는 이렇게 이어진다. ‘이 섬 위에 꾸미고 계신 원장님의 천국은 어떻습니까. 정직하게 말해 그것은 이 섬 원생들의 천국이기 전에 우선 원장님의 천국인 것입니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오직 원장님 한 분만의 천국일 수도 있습니다. (중략) 원장님께서 섬 위에 이룩하시고자 하신 천국이 가까이 오면 올수록 이 섬은 그 원장님의 단 하나의 명분에 일사불란하게 묶여버린 얼굴 없는 유령 집단의 섬이 되어갈 뿐입니다. 하여 점점 다스리기가 쉬운, 그러나 개개인의 삶을 찾을 수 없는 생기 없는 유령들의 섬이 되어갈 뿐입니다.’(385·395쪽)

이청준은 생전에 이 작품을 쓴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일방적 독선에 흐르지 않고 서로 조화롭게 화동하여 강요된 천국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함께 건설해 갈 공동 운명의 보편적 ‘인간천국’을 실현해가는 과정을 되새겨보고자 했다.”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적혀 있다. 공화국은 시민의 나라다. 왕의 나라, 간신의 나라, 그 뒤에 숨은 사악한 무리들의 나라가 아니다. 이청준은 개정판(1984) 서문에서 ‘당신들의 천국’을 ‘우리들의 천국’으로 거침없이 행복하게 바꿔 불러도 좋을 때가 온 것인가’라고 물었다. 32년 전 그의 물음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상언 사회2부 부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