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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자는 작곡가의 드라마를 잘 전달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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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호 14면

‘건반 위의 서정시인’ 머레이 페라이어(Murray Perahia·69)가 5년 만에 독주회로 내한한다. 그런데 이번엔 지금까지의 면모가 아니다. 2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펼쳐질 공연은 여느 때와 다를 것이 확실하다. 이유는 세 가지다. 우선 페라이어는 40년간 파트너였던 소니 뮤직에서 도이치그라모폰으로 이적했다. 새 음반 바흐 ‘프랑스 모음곡’ 표지를 보면 그의 은발만큼 노란 딱지가 낯설다. 둘째, 최근 들어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일신했다. 그동안 ‘페라이어’하면 떠오르던 이미지는 서정적, 시적, 말쑥함 등이었다. 그런데 최근 그의 공연을 본 평론가들은 이구동성으로 “페라이어가 저돌적이고 맹렬한 스타일로 바뀌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변신을 확인할 수 있는 무대다.


세 번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그의 베토벤 ‘함머클라비어’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페라이어가 무대에 올리기 위해 10년을 준비한 난곡이다. 동일한 프로그램으로 연주한 미국 투어에서 뉴욕 타임스는 “기다림이 아깝지 않았던 공연”, 워싱턴 포스트는 “거침없는 질주”라는 찬사를 보냈다.


공연을 앞둔 머레이 페라이어를 e메일로 만났다. 그는 자신의 변모한 스타일을 인지하고 있었다.


5년 만에 서울에 온다. 베토벤의 ‘함머클라비어’ 소나타를 최초로 선보인다. 하이든 변주곡과 모차르트 소나타 K310, 브람스 간주곡 Op.116ㆍ118ㆍ119도 연주한다. “‘함머클라비어’는 어려운 도전이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연습했다. 이 작품을 고려한 고전적인 곡들로 프로그램을 짰다. 하이든 변주곡은 모차르트가 사후 그에게 헌정한 곡이다. 두 번째 변주에서 모차르트의 특징이 나온다. 모차르트의 소나타는 어머니를 여읠 때쯤 작곡한 극적이고 강렬한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브람스의 곡들 역시 ‘함머클라비어’를 듣기 전 도입부로서 가장 어울리는 곡들이라 생각한다.”

‘함머클라비어’ 소나타는 27세 때 연주하고 한동안 치지 않았다고 했다. 이번 무대에서는 어떤 점을 유념해 해석할 생각인가. “연주하기 너무 어려운 곡이다. 재작년 여름 2개월 정도 시간을 내서 오로지 이 곡만 파고들었다. 이제 어느 정도 확신을 갖게 됐고,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1악장은 빠른 템포로 진행된다. 베토벤도 빠르게 연주하라고 표시했지만 난 조금 과하다고 느낀다. 음악은 작곡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드라마를 전달해야 한다. 그래서 내 생각엔 조금 천천히 연주하는 편이 낫다. 3악장에도 템포가 명시돼 있지만 모두 따르지는 않을 거다. 당대 베토벤에게 템포를 문의한 사람들이 있었다. 베토벤은 ‘그 표기는 오직 그 마디에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답했었다. 악상 표기는 곡의 느낌을 전달해 주기 위한 수단이다. 전적으로 따라야 하는 규율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곡의 심장이자 하이라이트는 3악장이다. 그때 베토벤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 듯 외롭고 우울하다. 이어지는 푸가는 장대하다. 신을 표현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 있어서 일일이 따라가기 벅차다. 그래도 이 슬프고 느린 악장을 마무리하며 희망을 표현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연주 스타일이 180도 바뀌었다고들 한다. 트레이드마크였던 시적이고, 서정적이며, 깔끔하고 단정한 스타일에서 야성적이고, 저돌적이며, 맹렬한 분위기로. 이런 지적에 공감하나. “내 모습이 객관적으로 어떻게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곡의 어떤 특정 부분보다는 그 곡 전체를 표현해내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아름다운 한 순간보다는 그 곡이 지닌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더 초점을 두는데, 이에 따른 결과가 아닐까.”

소니에서 DG로 이적한 이유는 무엇인가. 새 레이블에서 어떤 곡들을 녹음하나. “소니에서 녹음한 지 40년이 지났다. 계약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다. DG에서 연주할 레퍼토리는 지금까지 녹음하지 않았던 곡들이 많다. 이번에 바흐 ‘프랑스 모음곡’을 발매했고, 11월에 베토벤 ‘함머클라비어’를 녹음한다. 이 밖에도 처음 녹음하는 하이든이나 바흐의 곡들도 장기적으로 계획하고 있다.”


평소 즐겨 듣는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있는지. “취향이 워낙 폭넓다. 호로비츠의 연주를 좋아하는데, 개인적인 만남을 떠나 피아니스트 자체로서 그의 연주를 즐겨 듣는다.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이나 아르투르 슈나벨 등 많은 피아니스트들의 다양한 연주 스타일을 좋아한다.”


연주 여행을 가면, 하루를 어떻게 보내나. “새로운 장소에 가면, 주변 환경과 익숙해지기 위해 걷는 걸 좋아한다. 그러나 연습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매일 아침 3시간, 오후 2시간 연습을 한다. 가끔은 오후 연습을 빼고 박물관에 가기도 한다.”


리즈 콩쿠르 후배인 김선욱 등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세계를 무대로 활동중이다. 이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좋아한다. 항상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생겨서 즐겁다. 연주에 서사를 녹여내고, 이론적으로 곡을 설명할 줄 알아야 한다. 나처럼 연주하라는 게 아니다. 다만 내가 그들의 연주에서 뭔가 발견했을 때 내가 해주는 말을 이해하고 반응하기 위해서 이론적인 능력은 꼭 필요하다. 자신의 곡 해석을 위해서도.”


앞으로의 계획은. “11월에 ‘함머클라비어’ 녹음을 마친 뒤에 런던과 몇몇 도시에서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와 베토벤 협주곡을 연주할 예정이다.” ●


글 류태형 음악칼럼니스트ㆍ객원기자 mozart@joongang.co.kr 사진 크레디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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