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최고 무용수들과 함께 역사적 무대 만들 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02호 8 면

지금 한국무용은 격변기에 있다. 세련된 연출이나 해외 저명 안무가와의 협업 등으로 현대무용과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한 세기 동안 중심에 있던 극무용의 위상이 축소되고 개념 중심의 추상적 무대로 옮겨가는 추세다. 발레의 경우 클래식 전막발레가 굳건한 가운데 모던발레가 춤판의 다양성을 담보하는데 비해, 우리 극무용은 꾸준히 공연되는 클래식 레퍼토리가 따로 없는 상태에서 그 근간부터 흔들리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해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초연된 서울시무용단의 춤극 ‘신시’는 그래서 반가운 시도다.


한동안 침체돼 있던 서울시무용단을 대표하는 레퍼토리로 키운다는 야심찬 기획 하에 국보급 안무가 국수호가 지휘봉을 잡고 오랜만에 선보인 스펙터클 대작이다.


올해 앙코르 공연(10월 27~28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은 단원들 외에 한국 무용의 기린아 이정윤을 비롯해 발레 무용수 김주원과 윤전일 등 스타 플레이어를 주역으로 더블 캐스팅하고, 뮤지컬 배우 20명을 동원하는 등 한층 업그레이드된 스케일로 거듭나고 있다.


막바지 리허설에 한창인 안무가 국수호(68) 디딤무용단장과 국립무용단 퇴단 이후 3년 만에 춤극으로 돌아온 무용수 이정윤(39)을 함께 만났다.

국수호 디딤무용단 이사장 겸 예술감독.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이수자로 중앙대 교수, 서울예술단 예술감독, 국립무용단장 등을 역임했다. 호쾌한 남성적 춤과 스펙터클한 무대 연출을 자랑하는 창작춤의 대가다. 고대 문화에서 춤을 재발견하는 확고한 작품세계 안에서 수많은 역사 춤극과 마당놀이, 창극 안무를 비롯해 창작발레 연출과 88서울올림픽 개막식·2002한일 월드컵 개막식 안무 등을 총괄했다.

‘용호상박’중에서 ⓒ한용훈

“귀신같다!” 인터뷰에 앞서 사진 촬영이 시작되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사실 촬영을 앞두고 고민이 깊었다. 각자 뚜렷한 카리스마를 가진 삼십 년 터울의 두 남성 무용가를 한 컷에 담으려면 어떤 포즈를 요구해야 할까. 문득 두 사람이 함께 췄던 ‘용호상박’이 떠올랐다. “오늘 촬영 컨셉트는 용호상박입니다”라는 한마디와 함께 부채 하나씩을 건네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국수호 단장의 신들린 ‘연출’ 하에 촬영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속사포 디렉션’에 찰떡같이 따라붙는 이정윤의 호흡도 빈틈 없었다. 지난여름 건강 이상으로 잠시 활동을 쉬기도 했던 국 단장은 전날 중국 출장에서 막 돌아온 상태였지만 피곤한 기색도 없었다.


찰떡 호흡의 두 무용가가 사제지간은 아니다. 이들의 인연은 국 단장이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을 지내던 1996년,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개작한 춤극 ‘무어랑’에 이정윤이 군무로 서면서부터다. “선생님은 기억 못하실 거에요. 대학 1학년 때 객원으로 불러주셔서 군무 제일 뒷줄에서 망토 쓰고 꿈의 무대를 훔쳐봤던 기억이 저한테는 있죠. 그때부터 국립에 가고 싶단 꿈을 키웠고, 그후 수많은 작품으로 만나면서 선생님의 철학에 젖어들게 됐습니다.”(이정윤, 이하 ‘이’)


“국립에서 배정혜 선생이 안무한 ‘춤, 춘향’을 내가 연출할 때 처음 재목이란 걸 인지했고, 그 다음 ‘가야’에서 우륵과 니문의 역할을 번갈아 맡기며 신뢰감을 굳혔죠. 큰 무대를 주인공으로 끌어갈 몫이 있다는 건데, 그건 재질만이 아니라 노력으로 기운을 쌓아야 하는 거거든요. 그런 기운을 가졌으니 나와의 대결인 ‘용호상박’에서도 맞짱을 뜰 수 있었던 거죠. 30년 후배지만 이렇게 존재감을 더해가며 있어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국수호, 이하 ‘국’)


2014년 선생의 춤 50주년을 기념한 ‘춤의 귀환’ 공연에서 초연해 “전통춤의 새로운 전기 마련”이란 평가를 받으며 대한민국무용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용호상박’은 삼국지 적벽대전을 모티브로 만든 남성 듀엣으로, 판소리 ‘적벽가’를 배경삼아 두 사람이 벌이는 춤 배틀이다. 올 연말 코엑스 메가박스 외벽에 설치되는 코엑스 언더월드 파노라마 ‘대가의 춤’ 코너에도 그 영상이 상영될 예정이다.


“그간의 내 춤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만들었어요. 선조들이 했던 가무악 형식 안에서 새로운 내용을 궁리하다 춤의 대결을 떠올렸죠. ‘적벽가’의 자룡 활쏘는 대목에 자룡·공명·조조·손권의 여러 꾀가 다 들어있거든요. 그걸 함축시켜 남자 둘이 배틀 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서로 용호상박으로 부딪쳐야 하니 내 춤의 노련함을 받아칠 수 있는 젊은 친구가 필요한데, 가장 나은 놈이 이정윤이었던 거죠.”(국)


“무용계 안에서도 이런 시도는 처음이었어요. 두 손 모아 배꼽인사 드리는 선생님과 한 무대에서 눈을 부라릴 수 있다는 게 엄청 영광이었죠. 무대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춤꾼 국수호의 내공을 경험하게 된 건데, 그 바람에 제 몸이 많이 아팠어요(웃음). 솔직히 저도 기가 센 편이라 웬만한 연배의 분들과는 자신있게 하는데, 선생님과 부딪치니 밀리더군요. 좀 더 기운차려 덤벼드는 맛도 다시 느껴보고, 재밌었습니다.”(이)

이정윤 코리아댄스시어터 예술감독. 2002년 국립무용단에 입단해 13년간 ‘춤, 춘향’ ‘도미부인’ ‘Soul, 해바라기’ 등 거의 모든 작품의 주역으로 활약한 한국무용계 최고의 스타 무용수다. 2014년 국립무용단 퇴단 후에는 현대무용과 발레까지 포용하는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그가 안무하고 김주원?윤전일 등이 출연한 창작발레 ‘봄의 제전G.’는 최근 중국 광저우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한용훈

[“이정윤은 내 노련함 받아칠 만한 친구”]


춤극 ‘신시’는 고조선 이전 한민족의 원류로 추정되는 홍산문화(紅山文化)를 배경삼아 단군신화 모티브를 춤으로 풀어냈다. 환웅이 강림해 웅족과 호족의 갈등을 해결하고 세웠다는 평화로운 도읍 ‘신시’를 통해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우리 사회가 상생의 길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웅녀를 향한 사랑에 응답받지 못한 잔인한 호족장이 전쟁을 일으키고, 갈등을 해결한 환웅이 웅녀와 사랑을 완성한다는 스토리 라인은 국 단장이 직접 짰다. ‘고구려’ ‘가야’ ‘낙랑공주’ ‘명성황후’ ‘사도세자’ 등 자신의 수많은 춤극의 계보를 잇는 이른바 ‘국수호 역사춤극 완결판’이지만, 사실 지난해 불과 한 달 반 만에 초스피드로 완성된 사연이 있다.


“몇 년간 한국춤의 원천을 찾고 ‘춤의 집’을 짓는 일에 몰두해 왔거든요. 백제 궁중춤의 원류를 찾아 일본에 답사 갔을 때 제안을 받았어요. 제작기간이 너무 짧아 첨엔 거절했죠. 그런데 요즘 무용계 상황에서 구원투수로서 해야 할 몫이 있겠더라고요. 머릿속 저금통에서 ‘서울시무용단과 맞는 작품이 뭘까’ 고민하다가 끄집어냈어요. 70~80프로 구상해둔 덕분에 가능했는데, 다행히 세종문화회관의 거대한 무대 전체를 활용해 만든 미장센이 반응이 좋아 재공연까지 하게 됐네요.”(국)


오랜만에 대작 무대에 주연으로 서는 이정윤은 출연을 결심하기까지 고민도 많았다. 그간 무용수보다 창작자로서의 비중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무용수로서의 양심이랄까, 한창 때의 몸은 아니라서 과연 제 자리인가 싶었죠. 그간 부모님과의 이별도 있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직접 찾아와 작품을 통해 마음 다스리고 다시 설 수 있는 기회로 삼으라고 권해 주셔서 용기를 냈습니다. 이정윤에 대한 기대치를 배반하지 않으려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하고 있어요.”(이)


“초연보다 더 명작으로 남기고, 아예 춤극을 서울시무용단의 한 장르로 만들어 놓아야 할 것 같아서 한국 최고의 무용수들을 데려왔습니다. 함께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기고 싶어서죠. 김주원·윤전일도 발레의 감정 기폭을 극대화시켜 우리 춤극에 잘 담아내 줄 거에요. 최고의 무용수들이 놀라운 시너지를 보여줄 것 같아요.”(국)


환웅 역의 이정윤은 웅녀 김주원을 사이에 두고 호족장 윤전일과 대립 구도다. 윤전일이 발레리노 특유의 역동적 움직임으로 호전적인 인간 내면을 극대화시켜 보여주는 반면, 이정윤은 신적인 위엄을 유지해야 하는 절제된 캐릭터다. “호족장은 매력적인 캐릭터죠. 빛나는 조연 한 사람이 작품의 구성과 흐름을 좋게 만드는데, 섬세함과 역동성이 균형을 이뤄야 시너지가 나거든요. 환웅은 제우스 같은 존재라 호족이 무력으로 넘볼 수 없는 완전체 캐릭터랍니다. 힘보다는 아우라나 분위기로 제압해야죠. ‘감히 어딜 넘보느냐’는 느낌이랄까요.(웃음)”(이)


국수호 안무작을 많이 해 본 이정윤이지만 ‘신시’가 특별한 이유는 익숙한 단군신화를 색다른 ‘홍산문화’의 시점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정보를 주세요. 더 원초적이고, 아날로그 시대로 파고드는 부분도 흥미롭고, 캐릭터도 좀 달라요. 환상과 신화 속에 있는 인물이고 나라를 세운다는 무게감도 크니까요. 선생님이 무용가로서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도 느껴지는데, 예술을 넘어 나라와 사회를 생각하게 하는 점도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이)


90년대부터 우리 민족과 관련된 중국 역사를 탐구하다가 홍산문화를 접한 국 단장은 5천년전 부장품인 홍산옥기의 정교한 토템 조각에서 우리의 근원을 다시 보게 됐다. “환웅이 인문학적 체계를 갖추고 사물을 지배한 통달한 문명인이었다는 깨달음에서 홍산문화를 우리 건국의 역사라고 본 거죠. 춤 인류학자로서 춤을 통해 인류에 메시지를 보낸다는 차원에서 단일민족의 웅대한 서사시로 만들어 봤습니다. 태양 숭배·조상 숭배·탄생 기원의 미래기약적 명분을 가진 홍산옥기들이 무대에 거대한 사이즈로 나타나는데, 40m 깊이의 무대 안쪽에서 전방까지 환웅이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고 등장하는 프롤로그 장면에 우리 민족이 거듭나길 바라는 기원을 담았어요. 싸우고 용서하고 다시 생성하는 속에서 인간의 삶의 기본은 미래를 향한 생산이어야 한다는 가치를 발견했으면 합니다.”(국)

서울시무용단 춤극 ‘신시’

연습실에서

[“우리 시대에 볼 만한 새로운 춤극 필요”]


국 단장은 ‘신시’의 일간 무용예매율 1위 소식에 웃음 짓다가도 “7·80년대만 해도 공연을 8일씩 장기로 해도 매진됐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송범 선생은 명동예술극장에서 하루에 5번 공연을 해도 꽉꽉 찼죠. 최승희·조택원 선생의 부민관 귀국공연 때는 표가 쌀 6가마니 값이었는데 그게 매진될 정도로, 그때는 정말 그렇게들 춤을 좋아했어요.”(국)

배고픈 시절에도 그랬는데 지금은 뭐가 달라진 거냐 물으니 “요즘은 생각하면서 봐야 하는 공연은 외면받는다. 인문학이 없어진 탓”이라고 꼬집는다. “인문학이 없어지면 나라가 망하는 건데 말이죠. IT시대로 가다보니 IT를 활용한 새로운 유행과 맞물려 전통분야도 혼돈에 빠져 있는데, 이런 때일수록 국공립 기관들은 한국의 오소독스한 것을 지켜가야 해요. 일시적 유행과 지켜야할 전통은 구분해야겠죠. 20년 후 다시 옛것 되찾기를 시작하지 않으려면.”(국)


그는 각종 지원정책에서 원로들이 소외받고 있는 현실도 역사와 전통을 흔드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뉴욕시 춤 지원정책을 보면 마사 그레이엄이나 머스 커닝햄 같은 원로들의 아이템을 존중하고 그대로 역사를 만들어가게 지원하면서, 또 중진과 신진을 고르게 지원해 왔어요. 우리는 나 같은 사람이 ‘핫한’ 젊은이들과 같은 선상에서 평가받아야 되는 정책인데, 이래서는 역사를 가질 수 없죠. 전통을 지키는 쪽과 미래를 향하는 쪽이 고루 지원을 받아야 젊은 세대도 전통 지키겠다는 사람, 신전통을 만들겠다는 사람, 미래의 춤을 추겠다는 사람으로 다양해질 수 있지 않겠어요?”(국)


지난해 광주시립발레단과 아시아문화전당이 공동제작한 창작발레극 ‘봄의 제전G.’를 안무했던 이정윤은 젊은 창작자로서 춤극의 장르적 계승에 욕심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젊은 세대에게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을 아쉬워 했다.


“우리 시대에 볼 만한 새로운 형태의 춤극이라든지, 어르신들에게 조언받아가면서 하나의 장르로서 키워갈 수 있는 노선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런 정신을 배우며 같이 성장해온 선후배들이 있는데, 문제는 그들이 작품 만들어낼 환경이 안 되거든요. 국공립단체에서 레전드로 불리던 사람들도 단체를 나오면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걸 할 기회가 없으니 자기 언어를 바꿔야 하는 상황이 되죠. 우리 세대는 경험은 부족해도 전문성과 열정이 있으니, 그걸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절실합니다.”(이)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서울시무용단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