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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이 만난 사람] ‘노벨상에 근접한 학자’ 언급하는데, 내가 보기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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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김성근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장

그는 걱정부터 늘어놨다. 왜 한국은 노벨상을 못 받는지 비난할 책임자를 찾아내려는 거라고 지레짐작한 듯했다. 그래서 ‘용의자 찾기’를 위해 발언이 곡해되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과학자로서 마치 골을 못 넣은 축구선수가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으로 비치는 것을 염려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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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서울대 자연대학장은 10일 “정부가 하향식으로 연구 과제를 지정하고 유행이 바뀌면 또 그것 하자며 계속 따라다닌다”며 기초과학에 대한 상향식 과제 설정과 연구비 집행을 요구했다. [사진 최정동 기자]

김성근(59)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장은 2006년 교육부가 선정한 제1회 국가석학이다.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도 받았다. 그는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영국왕립화학회 펠로이고 유명 국제학술지 4곳의 이사도 맡고 있다. 10일 인터뷰 약속도 의장으로서 한 학술지(Physical Chemistry Chemical Physics) 편집이사회를 주재하던 런던에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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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에 대한 궁금증부터 물었다. 그는 “한국인이 노벨상을 받을 가능성은 현재로선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런 환경에 그 역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 강조했다. “노벨상을 꼭 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조건을 만드는 건 매우 중요합니다.”

노벨상 계절에만 보이는 관심이 부담스럽죠.
“노벨상 발표 때가 되면 언론사 전화를 많이 받습니다. 대책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몰라서 못하느냐, 알고도 못하느냐. 후자입니다. 뼈아프지만 우리 스스로 자성·성찰이 필요합니다.”
노벨상 타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노벨상 자체가 중요하기보다는 노벨상이 나오는 토양을 갖춘 나라가 되는 게 더 중요합니다. 노벨상 수상은 결과일 뿐이죠. 수상자가 나올 수 있는 나라와 나올 수 없는 나라가 있는데 우리는 후자에 속합니다. 기초가 안 되었다는 거죠. 노벨상을 탈 거냐, 말 거냐, 탈 거면 언제 탈 거냐, 누가 탈 거냐, 거기에만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 누구 누구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엔 탈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틀리기를 바라지만….”
왜 그런가요.
“노벨상이 단지 연구개발 투자만으로 해결할 문제인지, 나라 전체가 기초를 다져나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죠. 또 축구선수가 골을 못 넣은 게 문체부가 책임질 일이 아닌 것처럼 노벨상을 못 탄 것도 미래부 책임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과학자 책임입니다. 그 다음으로 정부도, 언론도, 그런 환경을 만든 국민도 책임이 있습니다.”
노벨상이 중요한 평가 기준이네요.
“노벨상은 여러 가지 상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노벨상을 탈 만한 사람이 다 타지는 못했지만 탄 사람 가운데 타지 말아야 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서울대 자연대가 세계 20위 수준이라고 평가되고 있는데.
“서울대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기초과학 수준이 눈부시게 성장해왔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에 비하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그때 화학과 졸업생 29명 가운데 25명이 해외 유학을 갔습니다. 국내에서는 공부할 수가 없어서였죠. 그런데 이제는 공부를 아주 잘해도 유학을 선택하지 않을 정도로 여건이 갖춰져 있고, 만족도도 높습니다.”
1989년 서울대에 처음 부임하셨을 때만 해도 시설이 부족해 다른 연구실로 학생들을 데려가 실험을 하기도 했다고 들었는데.
“연구자들에게 연구비가 충분하냐고 물으면 아무리 많이 줘도 부족하다고 하죠. 이제 서울대 같은 곳에서는 연구비나 시설이 모자라서 연구를 못한다는 얘기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아이디어가 부족하고 열정이 부족해 연구를 못한다는 편이 좀 더 솔직한 고백이겠지요.”
세계적 연구 흐름에서 떨어질 염려는 없나요.
“인터넷으로 정보를 교환하고 e메일로 늘 왔다 갔다 합니다. 학회에는 또 얼마나 자주 갑니까. 개인의 능력이고 역량이지 그건 핑계가 안 됩니다.”
연구비를 단기 성과 위주로 지원하니 장기 과제를 연구할 수 없다는 불만도 있던데.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연구비는 절대로 안 부족합니다. 우리나라 전체로 지난해 19조1000억원을 썼습니다.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엄청나게 높습니다. 총량은 충분한데 포트폴리오가 잘못돼 있습니다. 대부분 정부 주도로 나갑니다. 하향식이죠. 정부에서 ‘어느 쪽에 투자하니까 여기로 모여라’ 하는데 이게 잘못됐다는 겁니다. 세계 선진국 어디를 가더라도 기초과학을 포함한 공학과 의학 등의 기초 연구는 상향식입니다. ‘이런 연구를 할 테니 지원해 달라.’ 정부가 너무 앞장섭니다, 우리는 알파고가 터지면 ‘인공지능(AI)에 수천억원을 넣겠다’ 이런 식으로….”
정부가 선제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좋은 것 아닌가요.
“20조원 가까운 연구비가 대부분 하향식입니다. 공무원은 과장이건 실·국장이건 자기가 있는 동안 큰 업적을 내고 싶어 합니다. 제가 장관이라도 그렇게 하겠죠. 내가 6개월 할지, 1년 할지 모르는데 있을 동안 업적을 내야죠. 5년마다 바뀌는 정권이고 1년도 안 돼 바뀌는 자리라 조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행을 좇을 수밖에 없고. 한 분야를 꾸준히 연구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구체적인 사례가 있습니까.
“지난 3월 알파고의 반향이 컸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한국만의 현상이었습니다. 한국은 너무 유행에 민감하다고 할까, 굉장히 쏠림 현상이 있습니다. AI가 나온 것은 40년 전입니다. 그 사이 몇 번의 부침이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왜 AI 기반이 약하냐고 물으면 바로 기초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초로 가야 할 돈이 다 AI로, 가상현실로 투자됩니다. AI와 가상현실에 외국 사람들은 가만히 있느냐. 더 앞서갑니다. 그러니 우리는 계속 따라가는 거죠. 외국은 기초를 다하기 때문에 어디서 뭐가 터질지 모릅니다. 우리는 계속 위에서 ‘이게 유망하다’며 갈 길을 지정합니다. 그런데 한 3년 뒤 만약 AI가 별 볼일 없다, 전혀 다른 게 뜬다고 하면 또 그거 하자고 할 겁니다. 지금 기초를 깔아놓으면 그때도 할 여력이 되는데 계속 따라만 가는 거죠.”
해외 석학들을 초청해 서울대 자연대의 연구역량을 평가받았죠.
“2005년 오세정 학장 때 제가 기획부학장 하면서 처음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1군 대학들끼리만 수년마다 품앗이로 평가해 줍니다. 아래 등급 대학은 부탁해도 안 해줍니다. 우리도 이너서클에 들어가려고 추진했는데 선뜻 응해줘 놀랐습니다. 많은 학과들이 하버드·MIT·스탠퍼드 등 최고명문대학에서 위원들을 모셨습니다. 일주일을 머무르며 자세히 평가해주고 갔는데 앞으로 자기들과 같이 얘기할 수 있는 학교라고 생각한 거죠. 10년이 지나 얼마나 질적 발전이 있는지 보기 위해 다시 해본 겁니다.”

해외 석학 12명은 서울대 자연대의 문제점으로 경직된 교수 채용 시스템, 단기 성과에 치중하는 연구 풍토, 원로 교수가 퇴직하며 자기 전공 분야의 복사판 후임을 임용하고 떠나는 관행 등을 보고서에 담았다.

노벨상은 기록경기가 아니어서
새로운 육상경기 만들어야 줘

노벨상을 받는 것도 중요하나
수상자 나오는 토양부터 갖춰야

5년마다 바뀌는 정권 성과 조급
꾸준한 기초과학 연구는 불가능

연간 20조원 연구비 총량은 충분
정부 주도의 하향식 과제가 문제

“가장 잘못된 말이 ‘노벨상에 근접한 한국인 학자’입니다. 노벨상은 기록경기가 아닙니다. 100m를 9초7에 달리느냐, 9초8에 달리느냐를 가지고 주는 게 아니라 새로운 육상 경기종목을 만들어야 주는 겁니다. ‘노벨상에 근접한 한국인 학자를 수배해 봐라. 그 사람들을 지원하면 타겠지.’ 어림도 없습니다. 명문대에서 연구비 수십억원을 굴리는 사람보다 지방의 이름 없는 교수 가운데 자기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 중에서 나올 가능성 큽니다. 지금 잘나가는 교수에게 투자할 게 아니라 30대 교수에게 투자해야 합니다.”

그는 연구비를 많이 타는 교수의 공통점은 해외 연구를 벤치마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성낙인 총장이 기초연구 분야 젊은 학자에게 1년에 1억원씩 9년 동안 투자하는 ‘창의선도 신진과제’를 신설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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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체는 실용성을 강조하지 않나요.
“당연하죠. 말 그대로 기초라는 건 당장의 사용처를 생각하지 않고 궁극적인 호기심으로 하는 연구니까요. 그래도 무서운 점은 언젠가 쓸모가 있다는 겁니다. MIT 어느교수가 40년 전 터치 패널을 연구했답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신경을 안 썼죠. 그런데 그 사람이 없었다면 터치 패드가 있었겠습니까. 왜 연구했겠습니까. 정부가 ‘40년 뒤 이런 수요가 있을 테니 해라’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어떤 정부도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S BOX] “서울대가 키워내는 동질한 인간만으론 노벨상 어림 없어”

김성근 학장에게 노벨상을 받는 길을 물었다. 먼저 그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초과학이나 국가의 장기적 프로젝트에는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말자. 부정이 있지 않는 다음에야. 정권이 바뀌건 공무원이 바뀌건 기초과학 연구는 10년, 20년 긴 호흡을 허용해줘야 합니다. 당장 노벨상이 안 나온다고 정책을 이리저리 바꾸고 과학자들은 그런 정부가 잘못했다고만 하지 그런 가운데서도 어떻게 하면 창의적 연구를 할까 도전하지 않습니다.”

그는 또 다양성을 강조했다.

“다양성이 뭐냐. ‘이탈자’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같이 가는데 거기서 튀는 아이들이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그걸 인정하고 북돋워줘야 합니다. 한국 사회는 잘라버립니다. 지금처럼 서울대가 키워내는 동질한 인간들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는 세계 어디를 가도 어느 레스토랑이나 손님마다 메뉴판을 주는데 한국에서는 몇 개만 준다고 했다. 대개 윗사람에 맞춰 통일된 메뉴를 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양성은 우리 문화에서 계속 제거돼 왔습니다. 이제 그걸 풀 때가 됐습니다. 식당에서부터 각자 먹고 싶은 걸 시켜야죠. 연구 과제도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라. 이게 중요합니다. 기초 연구의 지능 체계는 다양성의 인정과 거의 동의어입니다.”

그는 토론 문화부터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개교 70년을 맞은 서울대가 시설과 사람은 바뀌었는데 교육 방식은 안 바뀌었습니다. 교수가 일방적인 강의를 하고, 칠판에 쓰고, 질문하라면 안 하고…. 받아 적어 암기하고, 성적 잘 나오면 똑똑한 줄 착각하고 졸업합니다. 토론해야 합니다. 교수의 일방적 지시와 가르침이 아니라 스스로 답을 찾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권위주의 체제에서 벗어나고, 젊은이들도 목소리를 내고, 자기 길을 가고, 다양성도 살아납니다. 도전적인 질문 혁명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김진국 대기자 kim.jinkook@joongang.co.kr
정리=윤재영 기자
사진=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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