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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뿌리 한국문화 >10< 강신굿모방한 일「시조신화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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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구마모토 (웅본) 에서 다찌노(입야) , 다카모리 (고삼) 까지 철로연변과 그곳에서 다시 아소 (아소)의 준봉을 누비는 다카지로 (고천수) 행 버스길 좌우에는 어디라고 할것없이 원시림처럼 우거진 숲과 맑은 계곡, 그리고「신화의 후루사토(고향)」라는 입간판이 눈길을 끈다.
고천수에 닿았다.
미야자키 (궁기) 현 서구저군에 위치한 태고적 신화가 재현되고 있는 마을이었다.
그들은 이곳을 천손강림지라고도 부른다.
10여년전 이곳을 찾았을 때 조선촌이 있다고들었으나 그것은 실재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필자를 놀라게 한것은 이곳이 한국신화에 나오는많은 지명과 함께 일본신화의 현실재현지라는 점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곳에는 우리 『삼국유사』 중의 기록뿐 아니라 현지명으로 실존하는 태백산(궁기현 아랑군과 구저군계에 있는 일명 제우산)·묘향산 (고천수의 이명) 이 남아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락국기』 에 보이는 귀지봉이 그들 표음으로는「구시후루」 (くしふゐ)라고 발음하는 환?봉 (고천원에서 뻗은 소봉으로 고천수정삼전정 동남에 위치함) 이 실재했다.
또 백제의 서울 소부리와 신라의 서울 소벌의 지명인 듯한 첨산봉이「소호리야마노다케」(そはリゃまのたけ·일향·풍후·비후에 이르는 높이 1천7백87m의 높은산으로 일명 조모산) 라는 산이름으로 남아있고 그밖에도 이주변에 고천원·천암호·천향산·사황자봉등 산이름이 그들 신화의 원전인 『고지키』(고사기) 와 『니혼쇼키』 (일본서소)등에 나오는 모든이야기와지명을 그대로 축소·재현하고 있는 곳이 이 마을이었다.
이러한 신화의 축소판·재현지는 이곳뿐만 아니라 여기 규슈(구주) 만도 또 한 곳이 있으니 가고시마(녹아도)현 사량군무도산도 이와 같은 곳이다.
이들 양지역 간에는 서로가 자기네가 천손 강림의 땅이라고 주장해오고 있다.
그러면 그들『고사기』와『일본서기』 에 수록된 내용을 통해서 그들은 어멓게 그 내용을 실제로 재현하고 있는가?
필자는 현지교육위원회를 찾아 1955년에 촬영하였다는 신화의 재현인 그들의 「요카구라」(야신악)전장면을스크린을 통해 관람하고, 밤8시부터 시작된다는 현장의 놀이를 보기위해 고천수 신사로 갔다.
이는 일반 관광객들을 위한 것이나, 세말세초 (매년 11월부터 2월까지)가 아니면 그전과정의실제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이들 신화의 주인공이자 일본의 시조신인 「아마데라스」 (천조) 는 하늘에서 다카아마하라 (고천원) 에 내려왔으나 .그의 아우중 「수사」(수좌) 의 갖은 악행을 보다 못해 천암호에 숨고만다.
그러자 온 천지는 암흑으로 변한다.
그는 일신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놀란 80만 제신은 금기줄을 매고 온갖 요술과 기지를 동원, 웃고 노래하며 춤을 추어 그를 꾀어낼 궁리를 한다.
이때「아마노우즈메노미코토」(천전여명) 가 등장한다.
여기서 필자를 놀라게 한것은 그의 차림새와 그가 들고 나온 무패와 춤이었다.
모든 것이 우리의 무당춤과 동일하고 이 모든 장면이 우리의 강신굿과 닮았다는 사실이었다.
우리의 무복과 흡사한 흰바탕에 몇가닥으로 앞이 트인 옷을 입고 칡덩굴의 머리장식, 신들린몸가짐과 도약, 천지를 울리는 요란스런 신령소리, 그것에 청·황·적·백의 색지를 오려서 매어단「스즈」(すず)라는 무패, 그리고 두 박자로 높이 뛰는 그 춤사위…필자는 마치 우리 무무의 현장에 와있는것 같았다.
춤과 노래소리가 엇갈리는 속에 그 꾐에 빠진 천조신은 바위틈으로 얼굴을 내밀고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숨었기에 천지는 어두우리라 믿었으며 암흑에서 이런 웃음소리가 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천수력남신등 여러 역사신이 나와 그를 붙잡고 만류해서 다시는 굴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일본인들은 이처럼 신화세계를 현실세계에로 옮겨 놓았을 뿐만아니라 우리나라 고조선의 지명과 그 신화 일부를 이곳에 옮겨 놓았으며, 또 이를 재현하는데 있어서도 우리춤, 우리가락 전부를 재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 필자를 당혹케 한것은 명치7년(1874년)에 간행된 「천の암호신사출토 사사 좌등신관の보고서」인『고천수고대문자전』이었다.
이를 그들은 일명「진다이모지」 (신대문자) 라고 한다.
그 내력은 다름아닌 이들 신화의 원대지인 아마노이와도 (천の암호·인구 폭 35m, 깊이 25m, 높이 13m)를 정면으로 바라다볼수있는 암호천 건너편에 천조신의 신령을 모신 암호신사에서 시작된다.
이 절을 지을때 그 기초공사때에 나왔다는 길이 1자2치,너비 1자3치,중앙두께 2치5푼의 옹기에 덮인 개석하나가 출토되었으며 그속에는 천조의 영체를 상징하는 거울 하나와 함께 그 항아리 위에 덮은 개석에 신대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세종대왕때에 창제된 훈민정음의 자모음을 이리저리 그들가나(가명)와 상형문자로 변형시킨 우리의 한글바로 그것이 아닌가.
「미야자키」(궁기소팔낭) 가 지은『신대の문자』 라는 해설서 (암호신사장)에는 「신자오십음도」라 하여 우리 한글과 일본어 가나·상형문자를 대비시켜 풀이한 개석문 1백34자에 대한 설명이있다.
그 개석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것이 어주옹 (술단지)일까, 수옹 (물단지) 일까, 어식옹 (식기)일까. 화명명 (호노아카리노미코토=천조신의 이칭) 이 이곳에 숨었을때 놀이로서 봉공하던 대어경을 그의 영혼으로 모시어 천지암호의 이 산기슭 돌항아리 속에 넣어 숨겨 두노라.』
그러나 일본에서는 신대문자라고 전할뿐 그 창제연도와 창제사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일본 학계에서도 이 유물자체가 수치스럽다고 자인한 나머지 일고의 가치없는 것으로 판명, 문부성의 지시로 파손시켰다는 설도 있으나 필자가 만난 이곳 고천수정장 「가히」(갑비작상)씨는 당시 암호신사의 궁사 (주지)가 헛소문만 내었을뿐 숨기고 있다고 귀뜀해주었다.
지금도 그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이 개석문에 대하여, 그러나 그들은 한글에 연원한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글 (한글) 이 일본에 전한 확실한 연도는 알수없다.
1592년왕난때 잡혀가 10년만에 귀국, 당시의 일어를 우리말로 토를 단 진주인 강우성의 『첩해신어』(1676년·숙종2년) 라는 책이 있고, 당시 일본과의 관계를 살러보면 조선초기부터 시작된 국교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중단되었다가 「도요토미」 (풍신) 가의 몰락후 10년만에 재개되어 우리 통신사를 보낸 사실이 있다.
당시 일본 역관중에도 이미 우리글을 익힌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신대문자차출어계』라 하여 명치8년(1875년)3월30일에 고천수 제7대구 구장인 「기오마즈」(청수담) 와 궁사 「사토」(좌등신관) 가 궁기현 삼사 「후쿠야마」(복산건위)에게 각각 보낸 보고서가 이때 처음으로 공개된 것으로 보아 그 개석문의 조각 또한 그다지 오래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어쨌든 이곳을 천손 강림의 땅으로 굳게 믿고 있는 그들은 침악봉(くしふゐ=くし는 구지(귀지), ふゐ는 부리 (봉) 의 변음) 아래있는 이와토 (암호) 전설을 신봉한 나머지, 또 이를 후대에 전하기 위하여 그들은 밤마다 신악으로 재현하고 또 조작한 문자와 더불어 혼백을 상징하는 거울로써 길이 이를 지키고 전승시키고자 했던데 대하여 필자는 일말의 서글픔보다는 어느 의미에서는 오히려 한 가닥 경의와 함께 부러움마저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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