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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업으로 이어받은 ‘화침’ 남한서 이어갑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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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아버지는 북한에서, 아들과 며느리는 남한에서 한의사로 활동하며 남북한 양쪽에서 전통 한의 인술을 베풀어온 가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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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출신으로 40대 부부 한의사인 정일경씨(왼쪽)와 부인 한봉희씨가 지난 9일 경기도 고양의 ‘100년 한의원’에서 북한 한의사 출신인 아버지 정일훈(가운데)씨와 자리를 같이 했다. [사진 최정동 기자]

탈북자 출신인 정일경(42) 한의원장 가족 이야기다. 정 원장은 역시 탈북자 출신인 부인 한봉희(40)씨와 같이 경기도 고양시 식사동과 서울 서소문에서 ‘100년 한의원’을 운영 중이다. 함경북도 명천이 고향인 정씨 집안은 정 원장의 7대조부터 8대에 걸쳐 한의를 가업으로 이어왔다고 한다. 정 원장의 아버지 정일훈(91)씨는 평양의대 동의(東醫)학부 1기 졸업생이다.

탈북자 한의원장 정일경씨 가족
8대에 걸쳐 100년간 한의원 운영
‘자본가’탄압받자 부모·누나와 탈북
함경북도 출신 아내 한의대서 만나
“북한 핵실험한 길주 근처가 고향
통일되면 주민들에게 의료 봉사”

하지만 북한에서 엘리트 계층이자 특권 계층에 속했던 아버지 정씨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100년 이상 가업으로 한의원을 운영하며 잘살아 왔다는 사실이 오히려 약점으로 작용했다. 자본가로 분류되면서 최하층 계급인 ‘복잡 군중 계층’에 속해 줄곧 박해를 받아왔다. 실제로 아버지 정씨는 평양의대병원에서 10년간 한의사로 재직했으나 60년대 초 출신 성분 때문에 황해북도 사리원으로 좌천됐다. 다시 10년 만에 청진으로 이주해 거기서 정 원장을 낳았다. 아버지 정씨는 “출신 성분 때문에 차별을 당했고 북한 체제에 더이상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 1986년 중국을 통해 내가 먼저 탈북했고 이후 가족을 차례로 탈북시켰다”고 말했다. 정 원장은 청진의대 동의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대학 졸업 직후인 98년 4월 중국으로 탈북했으나 붙잡혀 북송돼 1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출옥 이후 다시 중국으로 탈북한 뒤 1년간 숨어지내다 위조신분증을 만들어 배를 타고 2000년 10월 인천으로 입국했다”고 말했다.

정 원장은 2003년에 어머니(85)를, 2006년에 작은 누나(45·간호사)를 국내로 데리고 왔다. 하지만 2005년 큰 누나는 중국 공안에 붙잡힌 뒤 북송돼 처형 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탈북 이후 북한 대학 졸업장과 의사면허증을 인정해주지 않아 한의원을 개업할 수도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2001년부터 2007년까지 상지대 한의대를 마쳤고 한의사 시험을 통과했다. 남한에서도 가업을 잇기 위해서 였다. 함경북도 길주 출신 탈북자인 부인 한씨를 상지대 재학 중에 만나 결혼해 자녀 3명을 두고 있다.

은행 대출을 받아 2008년 고양시에 한의원을 개업했다. “용하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한의원을 고양시 식사동으로 확장 이전했고, 지난 8월에는 서울 서소문에도 한의원을 추가로 열었다.

정 원장은 “아버지는 남한에서 새로 한의사 자격증을 취득하지 못해 한의원에서 진료를 못하고 있다. 그래도 아버지께서 남한 한의사가 된 아들과 며느리에게 북한의 전통 한의를 전수해 주셔서 큰 도움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정씨 가족은 집안에서 전수해온 독특한 ‘화침(火鍼)’법으로 뇌졸중·근골격계 질환 등 다양한 난치성 질환을 치료하고 있다. 화침이란 불에 가열한 침을 신체의 일정 부위에 짧은 시간 동안 놓아 치료하는 방법이다. 정 원장은 “북한의 핵실험장이 위치한 함북 길주군과 고향이 가까워 방사능 오염이 큰 걱정”이라며 “통일되면 우리 가족의 고향인 명천·청진·길주로 돌아가 고향 사람들에게 인술을 베풀고 싶다”고 말했다.

고양=전익진 기자 ijjeon@joongang.co.kr
사진=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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