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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수퍼 패션위크, ‘수퍼’를 잊다…‘패션 어벤저스’ 시대 저무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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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물 디자이너·수퍼모델 자리에 개성 넘치는 새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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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올’ 첫 여성 디자이너 마리아 그라지아 치우리는 디올 데뷔 컬렉션에서 여성성을 강조한 기존의 디올과 달리 펜싱을 모티브로 한 스포티즘 디자인을 선보이며 페미니즘을 패션에 녹여냈다는 찬사를 받았다.


지금 패션 동네는 지각 변동 중이다. 이달 막 끝난 세계 패션위크를 보라. 브랜드의 간판으로 군림하던 디자이너들이 대거 물러나면서 새로운 후예들이 자리를 꿰찼고, 극치의 깡마른 몸을 대접하던 모델계는 과거와는 달리 완전히 개성으로 무장한 신진들을 선호한다. 그동안 이름의 무게로, 획일화된 스펙으로 대접받던‘수퍼급’ 패션계 거물들이 점차 사라지는 셈이다. 언제나 바꾸고 달라져야 살아남는 패션계의 숙명이 또다른 변혁을 이뤄내고 있다.

디올·생 로랑 … 새 디자이너의 데뷔 잇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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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디올 이후 이브 생 로랑, 존 갈리아노 등 오직 남성 디자이너만 발탁했던 ‘디올’이 처음으로 여성 디자이너 마리아 그라지아 치우리를 내세웠다.

올 패션위크는 관전 포인트가 분명했다. 브랜드에서 새로 발탁한 디자이너의 데뷔 무대들이다. 그도 그럴것이 자리를 옮긴 이들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파리가 핵심이었다. 올 초 패션 하우스들이 사활을 걸고 발탁한 히든 카드들의 무대가 파리에 몰려있었다. 가장 강력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인물은 디올의 마리아 그라지아 치우리. 디올로 옮긴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뉴스 메이커가 됐다. 디올이 어떤 곳인가. ‘무슈’ 크리스천 디올의 사망 이후 이브 생 로랑, 마크 보핸, 지안프랑코 페레, 존 갈리아노, 에디 슬리먼, 라프 시몬스 등 내로라하는 7명의 남자 디자이너가 거쳐간 ‘금녀의 브랜드’ 아닌가. 그런 곳에서 치우리가 최초의 여자 수장이 됐으니 화제가 될 수밖에. 물론 자격은 충분했다. 지난 시즌까지 피에르 파올로 피콜리와 함께 발렌티노에서 일했던 치우리는 요 몇 년 새 카무플라주 패턴과 스터드 장식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대중적으로 빠르게 알려지던 참이었다. 그리고 이미 입증된 실력에는 이변이 없었다. 이번 디올 데뷔 무대에서 치우리는 펜싱복을 모티브로 스포티한 옷을 선보이며 ‘페미니즘을 패션에 녹여낸 독창성’이라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여성 디자이너가 이끄는 새 디올 시대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치우리와 함께 주목받은 사람은 더 있다. 에디 슬리먼이 떠난 ‘생 로랑 컬렉션’의 후임자로 발탁된, 1982년생 디자이너 안토니 바카렐로였다. 그는 과거 칼 라거펠트 수하의 펜디 디자인팀원으로 일했고, 최근엔 베르사체의 세컨드 라인인 베르수스 컬렉션을 이끌며 패션계 블루칩으로 막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올 봄 그의 전격적인 발탁 소식이 전해지자 패션계에선 설왕설래가 오갔다. 독특한 스타성으로 브랜드 색깔을 굳힌 전임자를 어떻게 뛰어넘을지에 대한 우려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보란듯이 생 로랑 첫 무대에서 과거 아카이브를 재해석하는 정석을 따랐고, 1982년 입생 로랑의 레오파드 무늬에서 영감을 받아 내놓은 다양한 의상은 호평을 받았다.

‘랑방 컬렉션’의 여성 디자이너인 부슈라 자라도 이번 컬렉션으로 신고식을 치렀다. 자라를 지켜보는 시선도 뜨거웠다. 14년이나 몸 담았던 디자이너 대선배 알버 엘바즈가 수익 부진을 이유로 경영진에게 쫓겨나다시피 나간 뒤 뽑힌 인물이었기 때문. 수익에 대한 부담감을 안고 치른 첫 쇼에서 자라는 섹슈얼리티를 극대화한 슬립형 드레스와 턱시도 재킷 등으로 프랑스 쿠튀르 브랜드의 옛 명성을 이어갔다.

수퍼급 디자이너 자리 차지하는 루키들

이번 시즌 자리를 옮긴 디자이너에게 이목이 쏠린 건 단순히 숫자가 많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주목받은 이유는 이들 대부분이 ‘뉴 페이스’라는 점이었다. 과거 디자이너 교체는 오랜 경력의 톱스타급 디자이너들이 주요 브랜드를 도미노식으로 옮겨다니는 식이었다면 이번 시즌에는 그런 ‘회전문 인사’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파리의 디자이너 크리스텔레 코셰의 말을 인용, “새 디자이너들의 계승은 패션계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보여준다”고 보도했다. 이 ‘새로운 시대’는 단순한 세대 교체가 아닌 수퍼급 디자이너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의미한다.

1세대 수퍼 디자이너들은 무슈 크리스찬 디올과 이브 생 로랑,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와 우베르 드 지방시, 발렌티노 가라바니 등 이름이 곧 패션 하우스가 된 전설적 인물들이다. 이들의 뒤를 잇는 디자이너들도 만만치 않았다. 루이 비통의 마크 제이콥스와 구찌의 톰 포드, 디올의 존 갈리아노, 샤넬의 칼 라거펠트, 프라다의 미우치아 프라다, 베르사체의 지아니 베르사체, 랑방의 알버 엘바즈까지. 연달아 부르기에도 숨차게 쟁쟁한 이들이 1990년대와 2000년대를 아우르며 2세대 수퍼 디자이너 그룹을 이룬다. 그렇다면 이 다음은 누굴까. 아직은 확실히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뚜렷이 보이지 않을 지도 모른다. 자고 나면 새 인물로 또 바뀌었네, 정도의 존재감을 가진 다양한 디자이너들이 쏟아져 나오는 다양성의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의 조짐은 지난해 구찌가 이름도 얼굴도 안 알려진 알레산드로 미켈레를 디자이너로 발탁하면서 시작됐다. 예상치 못한 소식에 패션계가 들썩거리며 온갖 우려를 쏟아냈지만 결과적으로 기우일 뿐이었다. 미켈레는 트렌드와 상관없이 화려하고 재미있는 데다 성별을 뛰어넘는 독창성으로 브랜드의 전성기를 다시 만들어냈고, 이같은 성공 사례 덕분에 다른 패션 하우스들도 톡톡한 ‘학습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지난해 동안만 해도 뉴욕에선 DKNY가 다오이 초와 맥스웰 오스본을, 밀라노에선 ‘로베르토 카발리’가 피터 던다스를 브랜드를 대표하는 디자인 수장으로 내세웠다. ‘에밀리오 푸치’의 마씨모 지오르게티까지 포함해 누구 하나 대중적 인지도가 탄탄한 이들은 아니었다.

최근 가디언은 “전 세계 4대 패션위크 중에서도 가장 중심인 파리에서 새로운 트렌드가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수퍼’들이 떠난 자리를 빠르게 ‘루키’들이 채워간다는 얘기다. 온라인숍 네타 포르테의 사라 로트손 부회장은 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패션위크 정식 행사장 밖에서도 많은 신진 디자이너들이 데뷔 쇼를 벌일 뿐만 아니라 이들이 주요 선수들이 되고 있다”며 변화에 주목했다.

신구 세대의 바통 터치는 소비 환경과 맞물린 필연적인 변화다. 조만간 럭셔리 브랜드의 주요 고객이 될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 이후 출생자들)의 등장 말이다. 이름값에 의존하는 기존의 럭셔리 소비자들과 달리 밀레니얼 세대는 뭔가 신기하고 새로운 반전에 더 가치를 둔다. 유명 셰프를 내세운 고급 식당보다 농장에서 갓 따온 식재료로 요리를 해주는 소박한 식당을 ‘럭셔리’로 정의하는 식이다. 과거 브랜드의 명성을 후광 삼아 ‘어벤저스’를 방불케했던 수퍼급 디자이너들의 한판 승부가 더이상 먹히지 않으리라는 건 그래서 충분히 예측가능하다.

외모보다 개성…‘수퍼모델’ 세대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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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패션위크에서는 깡마른 금발의 전형적 모델보다 개성이 넘치는 모델들이 주목 받았다. (왼쪽부터) 애나 클레블랜드(보테가 베네타) · 애드오아 아보아(겐조) · 알래나 애링톤(샤넬) · 최소라(루이비통) · 야스민 위날덤(베르사체).

변화의 바람은 디자이너에게만 국한한 얘기가 아니다. 매 시즌마다 파리·밀라노·런던·뉴욕 등 4대 패션도시에는 런웨이에 서기 위해 수천 명의 모델들이 몰려드는데, 이들 사이에서도 관습을 깨는 일들이 속속 벌어지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이 선발 기준의 변화다. 지금까지는 쇼에 캐스팅 되려면 무조건 예쁘고 늘씬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개개인의 다양한 에너지와 개성을 발산할 수 있어야만 정상 자리를 꿰찰 수 있다. 런웨이 모델은 더이상 옷을 걸친 살아있는 마네킨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 증명해보여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최근 핫하게 떠오르는 모델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단박에 이러한 변화를 눈치챌 수 있다. 야스민 위날덤, 애드오아 아보아, 딜론, 애나 클레블랜드, 알래나 애링톤, 그리고 한국 모델인 이수와 최소라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히스패닉계 혼혈이나 동양인만 가지고 있는 피부색, 그리고 이국적인 분위기로 주목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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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디 대니스 마리티네즈(버버리).

이번 시즌 가장 주목받은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의 19살 소녀 엘리베이디 대니스 마르티네즈는 버버리 컬렉션으로 첫 데뷔를 한 지 만 이틀 뒤에 구찌와 프라다 무대에 연달아 섰다. 과거엔 이처럼 빅 쇼에 연달아 서기 위해선 화려한 경력이 필수였지만 이젠 경력 없이도 다양성을 내세워 얼마든지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분위기다.

이처럼 패션업계가 다양성을 찾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광고 캠페인이나 쇼를 준비하는 브랜드 입장에서 다양한 개성을 지닌 모델들을 아이콘 격으로 사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백인에 금발, 일정하고 이상적인 몸매를 우선적으로 선호하던 글로벌 패션업계는 이제 팔이나 어깨에 새겨진 과감한 문신을 자랑스레 드러내거나 눈에 번쩍 띄는 컬러로 염색한 헤어 스타일을 가진 이들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댄스나 연기 등의 개인기까지 있는 모델들에게 가산점을 준다.

더불어 외모·경력 기준만큼이나 모델들을 뽑는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 인쇄된 컴카드와 포트폴리오 북을 들고 다니며 오디션을 봤던 모델들은 요즈음엔 화보 사진들 외에 각종 영상 컨텐트와 SNS 액티비티 및 팔로어 수까지 ‘스펙’으로 챙겨야 한다. 이는 모델들이 쇼가 끝나면 곧바로 SNS 상의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이처럼 달라진 트렌드 속에서 나오미 캠벨, 클라우디아 시퍼, 신디 클로포드 같은 수퍼모델의 전성시대는 이제 추억으로나 간직할 때가 됐다.

글=강주연 엘르 편집담당,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사진 퍼스트 뷰 코리아, 버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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