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왜 쿠데타 잦나] 정통성 취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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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필리핀에는 쿠데타를 양산하는 독특한 정치.사회적 문화가 있다. 1986년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의 집권 이래 이미 여덟차례나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다.

전문가들은 ▶고도로 정치화 된 군부의 영향력과▶선거없이 민중의 지지만으로 집권해 정권의 법적 정통성이 취약하다는 점이 쿠데타가 빈발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꼽는다.

현 정부는 2001년 1월 군부 주도의 민중 봉기로 조지프 에스트라다 당시 대통령이 쫓겨난 뒤 부통령이었던 아로요가 대통령직을 승계해 출범했다.

아로요는 아버지가 대통령이었던 대통령가(家)출신으로 대중적 명망이 높았지만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군부 내 친(親)에스트라다 계파의 쿠데타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등 재임 기간 내내 쿠데타설의 망령에 시달리고 있다.

아키노정권 때는 전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 계파의 군부에 의해 모두 여섯차례 쿠데타가 발생했다. 86년 마르코스가 조기 대선을 실시, 당선을 선포했으나 군부 일부가 반발하고 국민이 불복종 운동을 벌이자 마르코스 측은 아키노에 정권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키노 정부도 절차적 정통성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채 출범한 셈이다.

군부의 영향력이 거세다 보니 여섯 차례의 쿠데타가 모두 실패했지만 주동자 처벌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86년의 쿠데타에선 주동자들이 군 법원에서 '팔굽혀펴기 30회형(刑)'을 선고받는 등 경미한 처벌을 받았다. 89년 6차 쿠데타 때는 정부군과 교전으로 양측에서 1백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5백여명이 다치는 등 큰 희생을 치렀지만 주동자 처벌은 소속부대 내 감금처분에 그쳤다.

세종연구소 박기덕(朴基德)부소장은 "수많은 계파로 나눠진 군부가 정치권에 개입하고 있기 때문에 쿠데타를 처벌할 때도 정치적 득실을 계산한다"며 "군부의 입김 때문에 문제를 정치적으로 봉합할 수 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정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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