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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충청 어딜 가도 반기문·안희정 얘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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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8호 4 면

“결심한 대로 하시되 이를 악물고 하셔야 한다. 내가 비록 힘은 없지만 마지막으로 혼신을 다해 돕겠다.”


결기가 느껴지는 이 말은 김종필(JP) 전 총리가 지난 15일 뉴욕에 간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통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한 메시지다.


‘정치 9단’ JP가 마지막 혼신의 각오를 다질 정도로 이루고 싶은 것. 바로 충청권 출신 정치인을 통한 정권 창출, 충청대망론의 실현이다.


여권에 반 총장이 있다면 야권에선 안희정 충남지사가 충청권의 기대를 받고 있다. 충청대망론은 그간 충청권이 국가 지도자를 배출하지 못했음을 방증하는 용어다.


과연 충청대망론은 실체가 있을까. 내년 대선에서 충청대망론 실현은 가능할까. 중앙SUNDAY가 짚어봤다.


정치컨설턴트들이 제시하는 충청대망론 실현의 필요조건은 인구와 인물이다. 두 조건을 고려하면 실현 가능성은 과거보다 밝다고 볼 수 있다. 충청권(대전·세종·충남·충북)의 인구는 2013년 말을 기점으로 호남권(광주·전남·전북)을 넘어섰다. 통계청의 지난달 자료를 보면 충청권 인구는 542만6968명으로 호남권(524만547명)과 대구·경북(TK·518만6830명)보다 많았다. 부산·울산·경남(PK)은 804만9284명이었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은 “충청권은 그간 집권세력의 연대 상대로서 보조적인 역할에 만족해왔지만 최근 인구수나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정치 지형을 주도해 차기 지도자를 배출하고자 하는 민심을 자극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안희정 충남지사의 인물 경쟁력도 대망론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지난 22일 발표한 여론조사(19~20일 조사)에서 반 총장은 여권 차기 대선주자 가운데 31.6%의 지지를 얻어 2위인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13.4%)과 큰 차이의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안 지사는 야권 후보 조사에서 6.9%를 기록해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24.1%)-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16.7%)-손학규 전 더민주 상임고문(7.8%)에 이어 4위였다. 더민주 당내 경쟁으로 좁히면 김부겸 의원,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성남시장에 앞서고 문 전 대표엔 뒤진 2위다. 여기에 충북 청주 상당이 지역구인 4선의 새누리당 정우택 의원도 사실상 대권 도전을 선언했다. 지난 7일 ‘더 좋은 나라 전략연구소’라는 대선 싱크탱크를 출범시켰다.


충남 천안갑이 지역구인 새누리당 박찬우 의원은 “어디를 가도 반 총장이 화제다. ‘지역이 낳은 큰 인물’ ‘검증된 인물’이란 덕담이 오간다”며 “안 지사도 여성·청년층에 인기가 많고 ‘젊은 사람인데도 친화력이 좋다’는 칭찬이 나온다”고 말했다. 충북 청주 엄태석 서원대 행정학과 교수는 “과거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는 엄밀히 따지면 부친의 고향이 충청이어서 충청 출신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었다”며 “그에 비해 반 총장과 안 지사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진짜’ 충청인이고 여야 양쪽에서 당선 가능성 있는 후보로 떠올라 지역에서도 ‘우리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충청대망론의 주자로 거론되는 인물들에 대한 지역의 애착이나 기대심리가 과거 어느 때보다 높다는 것이다. 충청권에서 태어나 줄곧 살아온 김해서(65·충남 천안)씨는 “반 총장이나 안 지사 등이 여야에서 주목받고 전국적으로도 인기가 있어 기분은 좋다”면서도 “과거에도 JP나 이회창 전 총재, 정운찬 전 총리 등이 나왔을 때 충청대망론이 거론됐지만 실제 성공한 적은 없었다. 이번에도 말잔치로 끝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회창·이인제·이완구 등 번번이 좌절 김씨의 말대로 충청대망론의 역사는 ‘흑역사(黑歷史)’에 가까웠다. 건국 초기 충청 지역을 대표하는 거물 정치인으론 충남 아산 출신인 윤보선 전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그는 1960년 4·19 혁명으로 민주당이 집권한 후 국회에서 대통령에 선출됐지만 의원내각제 체제이던 당시 실권자는 장면 총리였다. 윤 전 대통령은 63년 대통령 선거에 나섰지만 박정희 후보에게 밀렸다.


61년 5·16으로 등장한 JP는 본격적으로 충청대망론을 만들어낸 정치인이다. 박정희 정권에서 2인자에 머물렀던 그는 철저한 지역 대결구도로 치러진 87년 대선에서 충청권의 약세를 실감하며 4위에 그쳤다. 하지만 이 선거로 충청의 맹주로 각인됐다. 이후 93년 김영삼(YS) 정권과 98년 김대중(DJ) 정권에서 ‘주주’로 참여했지만 2인자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고 결별의 길을 걸었다. YS와 DJ 입장에선 정권을 잡기 위해 필요했던 충청권 표를 끌어오기 위해 JP와 손을 잡은 측면이 강했다.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하고 치른 96년 총선에서 JP의 ‘핫바지론’은 정치적 소수자인 충청권의 비애를 풍자한 것이었다.


JP에 뒤이은 충청의 기대주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였다. 하지만 첫 도전인 97년 대선에선 JP가 참여한 DJP 연합과, 역시 충청 출신인 이인제 전 의원이 경합한 3자 구도에 가로막혀 고배를 마셨다. 2002년 두 번째 대선에선 노무현 후보의 충청 행정수도 공약에 무너졌고, 2007년 세 번째 대선도 역부족이었다.


이인제 전 의원 역시 두 번의 대선에 출마하며 거물 정치인의 반열에는 올랐지만 대권을 잡는 데는 실패했다. 지난해에는 이완구 전 의원이 국무총리에 오르면서 충청대망론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고 성완종 전 의원의 녹취록 파문이 터져 총리 사퇴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면서 사그라들었다. 정운찬 전 총리 역시 만년 정치 유망주에 머무르고 있다. 김창권 한길리서치 대표는 충청대망론에 대해 “아직 충청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한 허전함과 JP 같은 거물 정치인에 대한 향수, 영호남 주도의 정치구도에서 보조 변수로 취급받아온 콤플렉스, 영호남 간 극한의 정치구도를 해소하자는 명분 등이 충청대망론을 배양하는 자양분”이라고 분석했다.


충청대망론을 실현하려면 선거에서 충청권의 표 결집이 필수적이다. 역대 선거에서 충청 표가 결집한 대표적인 경우론 87년 대선을 꼽을 수 있다. JP는 이 선거에서 8.1% 득표로 노태우-YS-DJ에 이어 4위에 그쳤지만 충남에선 45%로 1위를 차지했다. 충북에서도 전국 평균보다 높은 13.5%로 DJ를 제치고 3위에 올랐다. JP가 YS 정권과 결별한 후 ‘핫바지론’으로 충청 민심이 들끓던 96년 15대 총선에서도 비슷했다. 당시 JP의 자민련이 충청권에서 24석을 석권한 반면 여당인 신한국당은 3석에 그쳤다.


반기문 배경엔 ‘충청·TK 연합’ 밑그림 하지만 이 두 경우를 제외하곤 전국 득표율에 비해 충청권 표가 유의미하게 결집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2002년 16대 대선에선 이회창 후보가 노무현 후보의 행정수도 충청 이전 공약에 밀려 오히려 충청(대전 39.8%, 충남 41.2%, 충북 42.9%)에서 전국 득표율(46.6%)에 못 미치는 표를 얻었다. 민간 정치 싱크탱크인 ‘더모아’의 윤태곤 정치분석실장은 “충청권에선 지금까지 대선에서 그 누구도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 후보가 없었다. 반 총장이 나선다 하더라도 50%를 훨씬 넘지는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충청대망론이 정치인만의 ‘프레임’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안 지사는 22일 관훈클럽 초청토론회에서 “충청대망론은 새로운 통합과 미래를 위한 지도자를 지역에 가두는 어법”이라며 “다른 지역이 백번 지역주의 정치를 한다 해도 충청은 그래선 안 된다. 그게 JP 평생의 비애 아니었나”라고 말했다. 충북 지역의 더민주 관계자도 “당초 충청대망론이라는 단어가 정우택·이완구 등 정치적 야심을 가진 인사들이 자가 발전하면서 시작됐고 정작 이들은 대권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며 “과거 호남처럼 실제 민심을 움직일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반면 정우택 의원은 23일 충청대망론에 대해 “영호남 패권주의, 동서 분할주의에 대한 국민의 다른 기대를 뜻하는 것이라 본다. 이번에는 영호남이 아닌 제3의 지역에서 인물이 나오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의미를 국민이 부여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충청권의 지역적 한계가 여전히 높다는 냉정한 시각도 있다. 정치평론가 유용화씨는 “외형으로는 인구가 호남을 추월했지만 이것으로는 영호남의 지역패권주의와 비교하면 아직 상대하기 버겁다. 특정 정당이나 인물에 몰표를 던지지 않는 충청인의 특성도 고려해야 한다”며 “이 때문에 다른 지역과 연대할 때만 충청대망론은 비로소 가능하다”고 말했다. 엄태석 교수도 “여당 후보는 영남, 야당 후보는 호남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반 총장의 배경엔 충청+TK 연합, 안 지사는 충청+호남 연합이란 밑그림이 그려지는 모양새다.


충청대망론을 앞세워 타 지역을 소외시키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선용 더민주 대전시당 대변인은 “지역 입장에선 충청대망론을 내세울 수 있겠지만 대한민국의 통합을 이루는 대통령 후보로 나서야 대망론이 강화되는 것이지 지역의 이익을 앞세워선 실현될 수 없다”고 했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은 “충청대망론이 영호남 패권주의를 청산한다는 의미에서 탈지역, 충청인의 균형 감각으로 좌우 극단주의 이념을 극복한다는 점에서 탈이념의 메시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충형·유성운 기자 adch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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